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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우리나라 1호를 찾아]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온갖 ‘최초’ 화제를 뿌린 우리나라 호텔의 산증인
[우리나라 1호를 찾아]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온갖 ‘최초’ 화제를 뿌린 우리나라 호텔의 산증인
  • 서태경 기자
  • 승인 2008.04.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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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1914년 문을 연 당시의 조선호텔.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 열강들의 개항 요구와 함께 조선에 등장한 신문물이 있었으니 바로 호텔이라는 이름의 괴상한 장소였다. 인천을 시작으로 서울 덕수궁 주변까지 호텔이 들어섰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곳이 있다. 바로 올해로 개관 94년을 맞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숙박시설, 조선호텔이다. 

지금이야 주변에서 호텔을 발견하거나 머무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호텔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물론 옛날부터 주막이나 여관 등 전통적인 숙박시설이 있었지만 개항과 함께 현대적 시설의 호텔이 소개된 것은 1800년대 후반이었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1970년 신축 건물 개관을 기념해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테이프 커팅 장면.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요리를 담당하는 주방과 조리사들의 기념사진.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첫 번째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들어선 곳은 일찍이 개항을 한 인천이었지만 1899년 서울 노량진과 인천 사이에 철도가 놓이면서 인천의 숙박객이 줄게 되자 곧 문을 닫았다. 그 후 1902년 서울 정동에 독일인 손탁이 2층 규모의 손탁호텔을 건립하였지만 1922년 이화학당에서 이 건물을 헐고 플라이홀을 지었고, 이마저도 6·25 때 폭격을 당해 지금은 그 터만 표시되어 있는 상태다.

호텔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에 지어졌다 사라져 그 존재마저 알 수 없게 된 곳들과는 달리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최초’라는 숱한 화제를 뿌리며 건재해온 곳이 서울 중구 소공동의 ‘웨스틴조선호텔’이다. 건립 연도로만 따진다면 최초의 호텔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서구식 근대호텔 중에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레스토랑 팜코트의 풍경. 신여성이 차를 마시고 있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최초의 엘리베이터, 뷔페, 댄스파티 등 선보여
서울 한복판에 있어 쉽게 볼 수 있지만 실상 조선호텔이 그렇게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비교적 현대적인 외관 탓에 기껏해야 50~60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하는 이가 대부분인데 사람 나이로 치자면 무려 아흔네 살이다. 물론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새로 지은 것이지만 처음 개관한 게 1914년이니 우리나라 호텔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본격적인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관광뿐 아니라 근대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14년 10월 10일이 조선호텔의 공식 개관일로 이날 <매일신보>에 따르면 ‘진선진미한 조선호테루 낙성 - 본일부터 개업’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헐리기 전의 환구단 모습. 그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일단 환구단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호텔 위치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환구단은 고종황제가 천신께 제를 올리던 장소로,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이 천신이 아닌 천황에 제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일부러 이곳에 호텔을 지은 점은 씁쓸한 일이다. 하지만 광복 후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낸 것을 감안하면 조선호텔이 이미 우리 역사에서 치러낸 무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철도국이 건설한 ‘조센호테루’는 독일건축가의 설계로 지하 1층, 지상 4층의 최신서구식건축물이었다. 귀빈실이었던 201호를 포함해 총 52개의 객실과 한식당, 양식당, 커피숍, 로비라운지, 바, 댄스홀, 도서실까지 갖춘 당시로서는 유일한 초호화 건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개관 후 국빈과 고위관리들이 투숙하는 영빈관 역할을 도맡아 하는 등 한국의 정치, 경제, 사교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호텔은 개관 당시부터 ‘한국 최초’의 신화를 남긴다. 엘리베이터(일명 수직열차), 아이스크림, 뷔페식사, 댄스파티, 서구식 결혼식 등 서구 문화를 국내에 처음 보여주며 개화의 최일선을 이끌었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최근 리노베이션을 마친 객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풍파 거치며 국제 호텔의 모델로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잠시 조선호텔에 거처를 정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식 명칭인 ‘조센호테루’를 ‘조선호텔’로 개칭하였고 그 후 미군정 시대,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제3공화국 등을 거치면서 호텔의 소유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선호텔의 소유권은 1948년 교통부로 변경된 뒤 1963년엔 다시 한국관광공사로 소속이 바뀌었고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외국 자본과의 합작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1967년 한국관광공사와 아메리칸 에어라인즈사의 50 대 50 합작투자시대를 거쳐 1979년엔 세계적 호텔 체인인 웨스틴 인터내셔널호텔로 바뀌면서 호텔 명칭도 현재의 ‘웨스틴조선호텔’ 로 개칭되었다.

한편 한국관광공사가 가지고 있던 50% 주식은 1983년 정부투자기관의 민영화 추세에 따라 삼성그룹에 인계되었고 1992년부터는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신세계가 조선호텔 주식을 인수하였다. 현재는 신세계가 웨스틴 체인의 나머지 50% 지분을 완전 인수함으로써 100% 순수 국내 자본으로 운영되는 호텔이 되었다.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1970년 새롭게 문을 연 조선호텔. 2008년 4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그러나 아쉽게도 옛 조선호텔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1층에 자리한 레스토랑 나인스 게이트(구 팜코트)에 있는 역대 이곳을 방문했던 인물들과 옛날 호텔의 내외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현재 조선호텔은 주고객이 비즈니스맨이라 이들의 요구에 맞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2월 453개의 전 객실의 리노베이션을 마쳤고 인천공항에서 체크인이 가능한 익스프레스 체크인과 ‘디지털 TV 인포메이션 서비스’를 하고 있다. 또 전 객실에 휴대폰과 에스프레소 머신 등을 비치한 것도 국내 호텔 중에서는 처음으로 시작한 서비스다.   

벌써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로비와 레스토랑 리모델링이 한창인 2008년의 조선호텔 속에서 처음의 흔적들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조선’이라는 그 이름으로 오랫동안 조선을, 한국을 대표하는 호텔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조선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호텔이라는 든든한 ‘빽(?)’을 발판 삼아 ‘국내 최초’를 넘어 ‘세계 최초’의 무수한 타이틀을 기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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