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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기행] 경기도 남양주 다산 생가를 찾아 “꽃이 아름다우니, 열매도 많으리”
[역사기행] 경기도 남양주 다산 생가를 찾아 “꽃이 아름다우니, 열매도 많으리”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8.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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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남양주시에 자리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남양주]드라마 <이산> 제작진이 정조 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정약용의 캐스팅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개혁가이자 과학자였던 다산의 생가를 찾아 모처럼 그의 위대한 행적을 다시 더듬어본다. 

우연히 동네의 한 헌책방에서 먼지를 잔뜩 쓰고 있는 오래된 <현대역 목민심서> 한 권을 발견했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항상 곁에 두고 금과옥조로 여겼다는 책이 바로 <목민심서>가 아닌가. 먼지를 털고 누렇게 바래버린 책장을 들춰보며 정작 후손인 우리는(나는) 이 책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 너덜너덜한 책을 집어든 것이 정약용과의 첫 만남이다. 그날로 책을 틈틈이 읽기 시작했다. 간간이 정치인도 아닌데 ‘건방지게(!)’ <목민심서>를 읽는다며 우스갯소리로 핀잔을 들었지만, 휴머니스트로서의 정약용의 면모를 함께 읽을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잘 알다시피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본가로 돌아온 해에 저술한 책으로, 목민관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며 알아야 할 사항, 행동거지, 철학 등을 세세히 담고 있다. 그 자신이 실제로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재직하였고, 오랜 유배생활을 통해 궁핍한 백성들의 생활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였던 바, 책에는 실증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다. 그의 외조부 윤두서의 초상화를 보는 듯 촘촘하고 세밀하다.   

“공사(公事)에 틈이 있거든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고요히 해서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을 연구하며 지성으로 선을 구하라.”
- 율기육조(律己六條) 1조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유당 편액이 눈길을 끈다.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다산이 워낙 유배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그의 자취를 해남의 외가나 강진 ‘다산초당’에서만 찾는 이가 많지만 그의 생가는 경기도 남양주이다. 진작부터 다산의 생가를 찾아가봐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으나 꽃이 만개하고 화창한 날을 일부러 기다렸다. 

다산이 그렇게나 자랑했던 고향의 풍취를 좋은 때에 즐기고 싶었던 때문이다. 다산은 고향을 두고 “농사도 그리 많지 않고 땔나무는 멀리서 구해야 하지만 한 가지 으뜸은 경치다”라고 했다. 어사 박문수도 이 동네의 풍광에 반해 5년간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니 다산의 자랑이 과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벚꽃이 한창 휘날리던 4월 중순 평일, 드디어 그의 생가를 찾아 차를 몰았다. 다산의 생가는 전형적인 ㅁ자형 양반 가옥이다. 생가 앞에는 유명한 여유당(與猶堂)의 현판이 붙어 있다. 다산은 천주교 탄압을 미끼로 노론의 공세가 심해지자 정조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39세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여유당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조용히 지내고자 했다. 

낙향하기 직전 정조에게 올린 사형조참의소(辭刑曺參議疎)를 보면 “…죽기까지 전원에서 여생을 쉬며 보양하고 성스런 임금님의 은택을 노래할 수만 있다면 신에게는 남의 표적 안에 들 염려가 없고, 세상에는 눈의 가시를 뽑은 기쁨이 있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쓰고 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이 얼마나 많은 견제와 시달림을 받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때문에 다산은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노자의 말에 무릎을 치며, 자신의 병에도 이 두 마디가 약이 될 것이라 위로하고 있다. 반듯하게 씌어진 ‘여유당’의 현판에서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마음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의 아픔이 전해진다. 
 
현재 다산 생가는 다산이 살던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실제 생가는 1925년 큰 홍수가 일어 지붕이 다 찰 정도로 물이 들이치는 바람에 자취를 잃었고 이를 1986년 복원한 것이라 한다.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수원성 축조 시 창의적으로 다산이 만든 거중기.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깨끗하고 반듯한 이 집을 보고 다산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았다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그는 청빈을 넘어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아내 풍산 홍씨가 끼니를 걱정하였을 정도. 다산은 가난(貧)이라는 시에서 “안빈낙도하리라 말을 했건만, 막상 가난하니 ‘안빈(安貧)’이 안 되네. 아내의 한숨 소리에 그만 체통이 꺾이고, 굶주린 자식들에겐 엄한 교육 못하겠네”라며 매우 인간적인 토로를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아들들에게 ‘옷은 몸을 가리면 되는 것이고 음식은 연명하면 되는 것’이라 타일렀다. 소탈한 성품은 <목민심서>에도 드러나 ‘목민관이 임지에 부임할 때는 의복 등을 새로이 갖추지 말고 옛것을 그대로 써야 하며 수레에 이부자리와 솜옷 외에 책 한 수레를 실으면 그만’이라 말하고 있다.

다산 생가 옆에는 다산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산이 이룩한 위대한 자취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목민심서>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가본(假本)이 있고, 미니어처 인형으로 다산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재현해놓은 코너도 있다. 다산이 워낙 뛰어난 인물이어서인지 유명한 일화들이 많은데, 덕분에 의외로 이 미니어처 전시가 재미있다. 그중에 이계심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보자. 

이계심은 곡성 사람인데, 그곳의 사또가 군포를 착취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급기야 관에 들어가 호소를 하였다. 그러나 사또는 백성들을 매로 다스렸고 그 주동자로 이계심을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몰래 그를 감추어 달아나게 하여 이계심이 숲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런데 이 고을에 다산이 사또로 임명되어 오게 되었다. 

다산이 처음 고을에 들어오는데, 갑자기 행차를 막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계심이었다. 이계심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산에게 자수를 고하였다. 이에 다산은 “목민관이 폐정을 하는 것은 이를 보고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사람이다”라며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 한다. 

발길을 슬슬 생가 위쪽에 있는 다산과 부인 홍씨의 합장묘 쪽으로 옮긴다. 다산이 살아서 아들에게 자신의 묘 자리로 정해놓고 행여나 지관에게 어떤지 묻지도 말라고 했다던 땅이다. 소나무 그늘 사이로 작은 계단을 오르니 다산이 그렇게도 즐겼다던 남한강이 눈부시게 펼쳐져, 보기에도 시원하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찾았던 영국의 유명한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보면 조선의 낙후된 현실이 ‘곳곳에 만연된 권력자들의 비리 때문’이라 결론을 내고 무척 안타까워하는 대목이 있다.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다산 묘에서 본 생가 풍경. 2008년 5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염결(廉潔-청렴하고 결백하다는 뜻)이란 목민관의 본무이며 만선(萬善)의 원천이요 모든 덕의 근본이다(<목민심서>)”라는 다산의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비숍 여사가 처음에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했을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다산의 묘를 보며 좋은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그의 생을 아쉬워하고, 또 그나마 방대한 책으로 옳은 사상을 남겨준 데 대한 고마움을 함께 전한다. 

이곳에서 조용히 질곡 많은 역사를 함께 지켜보았을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산이 살아생전에 했던 말들도 아직 실현되지 못했는데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으랴 하는 마음도 슬며시 들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말았다.

“사람이 벗과 금슬과 서적을 대하여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스레 하기란 쉬운 일이나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 걸인, 비천한 자, 어리석은 자를 대하여서도 공경하는 빛을 잃지 않고 예의로 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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