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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철새 여행] 백로·왜가리 서식지, 무안 학마을  60년 용월리 터줏대감들의 아늑한 보금자리
[철새 여행] 백로·왜가리 서식지, 무안 학마을  60년 용월리 터줏대감들의 아늑한 보금자리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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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어미 백로와 새끼 백로의 모습.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무안] 철새 하면 으레 겨울 철새만 떠올리지만, 겨울을 피해 우리나라에 오는 여름 철새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백로다. 매년 3~4월이면 동남아 일대에서 겨울을 보낸 백로 수천 마리가 우리나라로 온다. 그 중 전남 무안의 용월리 상동마을은 백로와 왜가리가 떼를 지어 머무는 곳으로, 이 서식지는 천연기념물 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해안고속국도 무안IC로 나오면 불과 몇 분 거리에 용월리 백로 서식지가 있다. 부르는 이름이 길었다 싶은지 지금은 그냥 ‘용월리 학마을’이라 부른다. 백로와 학(두루미)은 엄연히 다르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뜻만 통하면 되지. 덕분에 훨씬 친숙하게 부를 수 있으니 여기에 대해선 패스!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아름다운 주변 경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포토 존’으로 사랑받고 있는 용연제.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좁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니 새들이 우는 소리가 점점 왁자지껄해지는 것이 백로들의 서식지가 가까워진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길모퉁이를 돌아들어 가니 눈앞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진다. 작은 언덕배기에 새하얀 백로들이 긴 목의 ‘S라인’을 뽐내며 살포시 내려앉아 있는 것이 마치 다른 세상 같다. 혹시나 올해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기우였다.  

급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카메라를 들고 냅다 뛰기 시작하는데, 이내 그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내 발 소리에 새들이 놀랄 수도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시간이 조금 지체된다고 해서 60여 년 동안 이곳을 제 보금자리로 삼은 저들이 어디로 떠나갈 것도 아니란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렇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러고 보니 산 아래에 있는 저수지 또한 범상치 않다. ‘용연제’라 불리는 저수지엔 연꽃이 만개했다. 그리고 저수지 가운데의 작은 섬에선 또한 수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백로들은 자신들의 둥지인 청용산 기슭과 저수지 섬을 유유히 오가며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용연제에 활짝 핀 연꽃.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학마을에 백로들이 찾아든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 3월. 당시 30여 마리가 처음 날아들었는데, 한국전쟁이 있던 50년대에 잠시 뜸하다 1966년에 다시 백로와 왜가리 떼가 날아들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내가 이 동네에서만 70년을 살았는디, 옆 동네는 전쟁통에 사람이 죽어나가도 여그는 사람 하나 안 죽었어. 그거이 다 백로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살어, 우리는….”

이 마을 토박이인 김점수 할아버지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백로를 한평생 같이 살아온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혹시라도 외부인이 산으로 들어가 새들에게 해를 끼칠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혼구녕’을 낸다고 한다. 

“그래도 처음엔 안 좋았제. 백로가 한 번 왔다 가믄 산에 소나무가 작살이 나제. 백로 똥이 냄새도 독하지만 거시기는 더 독혀. 지금도 산에 들어가 보면 땅이 누렇게 돼서 풀 한 포기 못 자라. 농사는 또 어떤가? 깨구리고 뱀이고 잡아 묵는다고 어린 모를 죄다 짓밟아붕께 이기 뭐 이런….”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새들을 제대로 관찰하려면 조망대의 망원경을 사용하자.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시끄러운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요, 천연기념물 지역으로 지정되어 마을엔 2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도 없게 되었다. 농사를 짓는데 농약도 마음대로 뿌리지 못한다. 주말이면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도 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불편함이 많지만 그래도 김 할아버지는 청용산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려도 겨울이믄 자꾸 달력을 봐. 쟈들이 음력 설이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오거든. 하루라도 늦춰지믄 ‘먼 일이라도 있나’ 싶고, 자꾸 산을 살피기 돼. 나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거나 다름없응께 있다가 없으면 적적혀.”

정확하게 음력설에 학마을을 찾은 새들은 추석이 되면 동남아로 떠난다. 도시로 보낸 자식들은 자주 찾아오지 않아도 백로들은 꼭 찾아오고야 만다며, 오히려 자식들보다 새들이 낫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다. 

“나 갈텨. 놀다 가.”
담배 한 대 피우시고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백로 관찰대로 발길을 옮겨본다. 망원경은 달랑 하나, 하지만 이거라도 어디냐며 궁둥이를 쑥 빼놓고 망원경에 눈을 들이댄다. 가까이 보이는 백로들은 보기보다 어린 것들이다. 아직 머리에 솜털도 빠지지 않은 녀석들이 둥지에 앉아 꽥꽥대고 있다. 먹이를 기다리는 듯 주둥이를 쫙 벌린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맞벌이’하는 부모를 둔 모습인지라 애처롭기도 하다.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아름다운 ‘S라인의 목’을 뽐내는 백로.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지금 시각이 오후 3시 40분. 어른 새들은 낮 동안 서해로 먹이 사냥을 나갔다가 한창 낮이 긴 요즘엔 6시가 되어야  둥지로 들어온다. 그래서 저녁 6시쯤부터면 하늘에 백로들과 왜가리들이 줄을 지어 날아다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서해 낙조가 시작되는 시간과 맞아떨어진다면 한 장의 달력 사진을 찍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백로 사진을 찍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물론 전문 사진가들이야 대포만한 망원렌즈를 사용해 척척 찍어낼 일이지만 일반 여행객이 들른다면 눈으로만 보고 갈 일이지 사진에 담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듯싶다. 

아직 어른 새들이 오려면 시간이 남아 있어 용연제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새들이 없더라도 연꽃 만발한 저수지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다. 하지만 새들과 어우러져 있기에 그 볼거리는 배가 된다.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어른 새들이 먹이를 찾으러 간 사이 둥지를 지키는 어린 새들. 2008년 8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김 할아버지의 말로는 원래 이 저수지는 경마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말을 타고 놀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다 저수지를 만들고 저 위에 있던 연꽃을 옮겨 심었다 한다. 가운데 섬도 새로 만들었고, 백로 서식지로 알려지고 난 후에는 섬 주위를 돌로 쌓아 정비했다.

제방 길을 걷는데 곳곳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리 시골 마을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자연이 잘 보존된 곳은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백로 때문에 농약을 거의 치지 않을뿐더러 무안군에선 학마을을 친환경 생태마을로 지정해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있기 때문. 백로들이 살다가 ‘작살 낸’ 소나무를 새로 심기도 한다. 이만하면 새 중에서는 1급 대접을 받는 셈.

6시가 조금 넘자 바다로 갔던 백로들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백로가 입에 물고 가다 떨어뜨렸는지 길 위에 웬 조그만 방게가 꼼지락거린다. 하루를 기다린 새끼들은 요놈 받아 먹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큰일이다. 

소박한 모습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기에 더욱 소중한 학마을의 낯선 풍경이 깊어지는 석양 속에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이제 곧 짧은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날 학마을의 주인들이 다음해에도 어김없이 이곳에서 따뜻한 한때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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