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가평]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가평 호명산 정상에 백두산 천지를 꼭 닮은 호수가 있다. 자연의 힘으로 생겨난 천지와 달리 호명호수는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이지만, ‘제2의 천지(天池)’, ‘천지연(天池淵)’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만큼 그 풍취가 빠지지 않는다.
호명호수는 경춘국도 춘천 방향에서 빗고개로 이어지는 호명산 능선의 중앙에 자리한다. 청평역에서 호명산 등산 코스를 따라 2시간쯤 오르면 장자터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를 넘어 300m 정도 가면 호명호수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등산 코스가 아니더라도 지난 7월 호수가 전면 개방된 후부터 관내버스로 호명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게 됐다.
다소 생경하긴 하지만 깊은 산 속을 가르는 아스팔트를 타고 버스 드라이브를 한다. 굽이치는 길을 타고 산을 오르는 버스는 심한 경사 때문인지 영 힘겨워 보인다. 연신 거친 엔진 소리를 뿜어대는 버스가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는 그림은 아무래도 썩 조화롭지가 않다. 하지만 산 정상까지 힘들이지 않고 데려다 준다는 사실을 그저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버스는 호명산 꼭대기에 관람객을 내려놓고 산 아래로 휑하니 머리를 돌렸다.
하늘빛 채색한 호수의 붓 터치
이곳이 호명상의 정상, 호명호수다. 호수의 모습이 백두산 천지와 비슷해 호명산의 ‘천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산머리에 물을 이고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국인데, 봉우리와 능선을 배경으로 깔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호수 안에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다. 호명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하늘과 구름을 채색한 붓 터치 같다. 새벽 운무와 일출도 장관이라는데, 밤하늘 아래 호수 풍경도 궁금해진다. 손에 만져질 것처럼 하늘이 가까우니, 별빛까지도 호수에 우수수 떨어져 있을 것만 같다.
호명산(虎鳴山)은 밤낮없이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632m로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험하고 인적이 드문 편이라 호랑이가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호랑이의 생김새가 산신령 같다는 이야기나 갓 태어난 개호주(범의 새끼)가 밤이면 사람과 어울린다는 정겨운 설화도 전해진단다.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거닐었다던 깊숙한 협곡을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이 또한 색다른 기분이다.
가만히 풍경에 취해 있는 것보다는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걷는 게 더 좋겠다 싶어 코스를 정하고 걷기로 한다. 48만㎡ 넓이의 호수를 끼고 입구 왼쪽부터 돌면 팔각정 전망대, 천상원, 제2전망대, 들꽃정원 순으로 산책할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그 반대다.
어차피 둥그런 호수이기에 발길 닿는 쪽으로 먼저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데, “반드시 두 전망대에 모두 올라봐야 주변 산세와 함께 호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가평군 문화해설사 사선화 씨의 설명이다. 안내판에 1, 2, 3코스를 친절히 써놓긴 했지만 아직 개방되지 않은 코스까지 포함하고 있어 참고만 하는 것이 좋겠다.
숲 속에 차분히 앉아 있는 팔각정을 시작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호수 산책로를 택했다. 이틀간 내린 비 때문에 촉촉하게 젖은 돌계단을 밟으며 팔각정 전망대에 오른다. 팔각정은 1층 전력홍보관, 2층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과연 호수와 함께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다. 하늘에 닿은 호수의 평화로운 풍경이 자분자분 다가와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팔각정에서 호수 반대편으로 돌아가니 호명산 줄기를 가로지르는 북한강과 청평댐이 보인다. 산 전체를 북한강이 둘러싸고 있는데다조종천과 범울이계곡도 산 사이와 주변으로 흐르니 이래저래 물과 참 인연이 깊은 산이라는 생각도 든다.
‘2% 부족한’ 전기, 호수가 채워준다
호명호수는 애초부터 관광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1980년에 당시로선 우리나라 최초, 동양에서 두 번째로 양수식 발전소가 건립된 것으로 완공 후에 자부심도 대단했을 터였다. 전력 사용이 적은 심야 시간대의 전기를 이용해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저수지에 저장했다가 전력 사용이 많은 시간에 물의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원리다. 상부저수지인 호명호수는 필요할 때 부족한 ‘2%’의 전기를 채워주는 든든한 백업 시스템인 셈이다.
그런데 호명호수가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멋진 풍광을 만들어내자 가평군은 이를 가평8경 중 2경으로 지정했다. 그동안 국가 주요시설로 단체 관람객이 예약을 하면 출입을 허용하는 정도였지만, 군과 양수발전소의 협의로 주차시설을 정비하고 85만㎡ 규모의 하늘정원, 조각공원, 전망데크, 산책로 등을 조성해 일반인에게도 출입을 허용했다.
새 단장한 시설 중 천상원(天上園)이라고도 불리는 하늘정원은 야생화와 호수, 그리고 이름처럼 하늘까지 감상할 수 있는 코스다. 나무데크를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아 잠시 호수에 마음을 맡겨두어도 좋다. 특히 마가렛, 흰줄무늬사사, 초롱꽃, 바위취, 참나리, 노루귀, 보라꽃, 작약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계절별로 흐드러진 꽃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야생화 군락을 지나 만나게 되는 사방으로 뻥 뚫린 문은 정말 하늘에 닿는 문처럼 신비롭다. 마치 문 속에 하늘이 꽉 들어차 있는 것처럼도 보이니, 이곳을 지나면 하늘을 밟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에 젖어도 본다. 한참 동안이나 하늘 위의 자유를 누려본다.
제2전망대와 들꽃정원을 지나 처음 버스가 내려준 호수 입구, 시작점에 도착했다. 그저 호수를 빙 둘러 걷는다면 1시간이면 충분하겠지만, 구석구석 피어 있는 야생화를 관찰하고 주변 풍광을 만끽하려면 산책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