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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감성여행] 지평선의 고장, 김제 광활한 대지, 마음으로 본 지평선
[감성여행] 지평선의 고장, 김제 광활한 대지, 마음으로 본 지평선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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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망해사 전망대에서 바라본 김제의 지평선.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김제] 한 번이라도 서해안고속국도를 달려본 사람이라면 김제를 지나며 혹시나 지평선을 볼 수 있을까 한눈을 팔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지평선이라는 게 쉽게 보이겠는가. 그래서 무작정 지평선을 찾으러 김제로 떠났다. 김제엔 정말 지평선이 있을까?

서김제IC에서 서해안고속국도를 내려와 김제로 향한다. 넓은 고속국도보다 수백 배는 더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이곳은 만경평야.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곡식창고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는 이 만경평야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직은 지평선을 찾아낼 수 없다. 하기야 이제까지 지평선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확실하게 본 적이 없기에 어쩌면 저것이 지평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평야의 끝엔 산이 있다. 반듯한 선 만들기를 방해하는 산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 지평선이라 우기기 좀 뭣하다. 역시 처음부터 성공할 리가 없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벽골제에 설치된 그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벽골제의 수문 돌기둥.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우선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중 하나인 벽골제를 찾기로 한다. 김제에서는 워낙 유명한 곳이고 지평선축제도 벽골제가 주 무대이니 뭐가 있어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다.  

평야를 옆에 두고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기분은 한껏 여유를 부리게 한다.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사이로 바람이 스치면서 가을향기를 머금는다. 코끝에 다가와 톡 터지는 그 향기에 기분이 좋아진다. 

가족테마공원으로 조성된 벽골제에서는 10월 초에 열리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농악전수관에서 울려 퍼지는 풍물 소리 덕분에 벌써부터 추수의 기쁨이 전해지는 듯하다.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 넓은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 또한 여유로운 것인가 생각한다. 

“김제 들판은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공원 한쪽에 세워져 있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문학비에는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 적혀 있다. 김제평야를 주 무대로 한 <아리랑>을 쓸 때 조정래 선생은 지평선을 보았으리라. 그곳이 어디인지 지금에서야 묻는다면 실례일까. 어쨌든 저 말이 아직도 유효하기를 기대하며 방죽을 오른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옛날엔 거대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작은 개울과 논이 된 벽골제.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방죽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다. 그 길이가 3.3km, 눈으로 열심히 원을 그려봐도 도저히 이을 수 없는 규모다. 그 위에 올라서니 누렇게 물들어가는 들판이 드넓게 펼쳐진다. 옛날엔 물로 채워져 있었을 공간이다. 그 공간이 파란 하늘과 어쩜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한 폭의 파스텔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방죽 아래 우뚝 솟은 두 쌍의 수문 돌기둥이 천년의 세월을 버티며 서 있다. 저 돌기둥이 제 구실을 할 때엔 분명 지평선이 시원하게 보였을 것이다. 농부들은 수문을 열며 지평선을 바라보고 풍년을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벽골제에선 지평선축제의 시작만 보았을 뿐 진짜 지평선은 보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해안고속국도와 29번 국도가 땅 위를 당당하게 뻗어나가며 시선을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저 도로들을 넘어가야 지평선을 볼 수 있을 듯해 혹시 바다 쪽으로 더 가까워지면 되지 않을까 싶어 심포항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안 되면 수평선이라도 보고 돌아갈 작정이다. 

심포항은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나는 삼각주의 꼭짓점이다. 하지만 2006년 물막이가 끝난 새만금방조제가 물길을 막아 앞으로 바다의 일부가 호수로 바뀌면 심포항은 더 이상 항구가 아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심포항의 수평선도 사라질 것이다. 

심포항의 망해사 전망대로 오른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의 ‘망해사(望海寺)’는 ‘망호사(望湖寺)’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건가? 새삼 문명으로 자연을 바꾸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길가에 핀 코스모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육각형의 정자 모양인 전망대에 오르면 서해가 한눈에 들어와 수평선 정도는 쉽게 볼 수 있다. 눈 아래로 보이는 크고 작은 섬은 야미도와 신시도다. 바다와 함께할 때 가장 아름다운 이 풍경이 어떻게 바뀔까 생각해보려다 그만둔다. 그건 그때 바뀌고 나서 생각해도 되니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에는 있는 그대로만 보자는 생각에서이다. 

수평선을 확인하고 나니 더욱 지평선을 찾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광활면으로 향한다. 만약 김제에 지평선이 있다면 이곳 광활면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얼마나 들이 넓기에 이름부터 광활면이라 했겠는가. 광활면은 우리나라에서 산이 없는 유일한 면으로 알려져 있다. 김제 광활면은 김제평야와 만경평야에 걸쳐 들어서 있는데 누런 벌판 사이로 바둑판의 줄처럼 그어진 흰 선은 시멘트 길이다. 어디로 들어서든지 길은 이어져 있지만 어찌나 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는지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딱 좋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평야에서 잠자리를 잡는 가족들. 2008년 9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길들. 한 번이라도 길을 잘못 들어서면 좋든 싫든 다른 길과 만나는 곳까지 가야 한다. 그렇게 똑같은 곳을 뱅뱅 돌 수도 있다. 들판은 운전자에게도 광활하기 그지없다. 

들판에서 서쪽을 바라본다. 어느 한 곳 시원하게 뚫리지 않은 곳이 있겠냐마는 결국엔 아슬아슬한 차이로 지평선 자격을 놓친다. 형형색색의 슬레이트 지붕들은 지평선을 야금야금 지워버렸다. 이들의 존재만 상관없다 치면 보이는 곳곳이 바로 지평선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활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이것에 쉬이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으리라. 
하지만 땅을 배경으로 하루하루 지독히도 당차게 삶을 꾸리며 새 지평선을 그려가는 농심(農心) 또한 지평선일 게다. 문명의 힘으로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었다면 그 땅의 끝도 새로운 지평선이다. 나는 오늘 몇 번의 지평선을 눈으로 확인했다. 광활한 대지의 한 가운데서 마음을 여니 눈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지평선들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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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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