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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만남과 여행] 경기도 광주 사람박물관 얼굴 옛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드립니다
[만남과 여행] 경기도 광주 사람박물관 얼굴 옛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해드립니다
  • 서태경 기자
  • 승인 2008.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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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박물관에 자리한 관헌석.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여행스케치=광주] 40여 년 동안 우리 민예품을 모아온 연극연출가 김정옥 씨의 보물창고가 경기도 광주 분원리에 있다. 개인이 이토록 많은 수집품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의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옛 서민들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사람 냄새 나는 박물관, ‘사람박물관 얼굴’이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관석헌이 마주보이는 마당에 민예품이 가득하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골동품들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무언가에 푹 빠져, 무언가에 반해 자신의 열정을 100%, 200% 쏟아 붓는 사람들이 있다. 열정도 돈으로 환산하는 요즘 “도대체 얼마를 벌기에” 혹은 “다 먹고살만 하니깐 가능한 거지”라며 마치 딴 세상 얘기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 이런 팍팍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거두절미하고 경기도 광주의 한 박물관을 찾아가보라. ‘사람박물관 얼굴’이다.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에 한가롭게 박물관 구경이라니. 속편한 소리가 아니다. 옛 사람들의 숨결에, 40여 년 동안 한결같은 길을 걸어온 김정옥 박물관장의 열정도 덤으로 가져올 수 있으니 말이다. 붕어찜마을로 알려진 경기도 분원리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는 사람만, 아니 마음먹은 사람만 찾아오겠다 싶다. 
 
인터폰을 누르니 그제야 박물관 문이 열린다. 마당부터 수많은 유물이 있어 아무나 드나들 경우 파손의 위험도 있고, 이를 통제할 만한 인력이 부족해 관람객에 한해 문을 열어준다는 것이 백종아 학예사의 설명이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김정옥 관장.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석상들이 가득한 마당 정면에는 한옥 관석헌이, 오른편에는 실내전시실이 자리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박물관을 운영하는 김정옥 관장은 연극연출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 유학 후 극단 ‘민중극장’과 ‘자유극장’ 대표,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장 등을 역임한 그가 무엇 때문에 사재를 털어 박물관을 만들게 되었을까. 

“그냥 좋으니까 했지요. 우리가 소홀히 생각하는 것들이 알고 보면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것이거든요. 1970년대 초부터 돈만 생기면 황학동으로 갔어요. 그때 거기서 이런 석상들을 처음 보고 사기 시작했어요. 요즘처럼 귀하게 여겨질 때가 아니니깐 그리 비싸지도 않았고요.” 

듣고 보니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과 호기심에서 출발했단다. 수집품 중 석상이나 인형이 많아 얼굴박물관로 불리게 됐지만, 사실은 우리네 민중들의 삶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보면 된다. 

“학술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도 하는데, 나는 그저 내가 봐서 좋고 아름다운 것에 초점을 맞춘 거지. 여기에서만큼은 제발 분석하지 말고 상상을 하다 갔으면 좋겠어요. 촛대 하나를 보더라도 수만 가지 상상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온갖 옛 물건들이 관석헌에서 제자리를 찾은 듯 보인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사람이든 물건이든 운명이 있는 법 
실내전시실을 둘러보는데 시 한 편이 눈에 띈다. 김 관장이 20여 년 전에 썼다는 ‘쓰레기’라는 시다. 

쓰레기와 더불어 산다 / 내가 죽으면 담박에 버려질 쓰레기와 더불어 / 내가 죽으면 그것들을 버릴 아내의 손을 생각한다 / 그리고 아내의 얼굴을 스쳐갈 쓴 웃음을 / 그리고 마침내 아내의 서글픈 표정을…

2004년 박물관 개관을 쓰레기통 하나 마련한 것이라고 표현한 김 관장.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고물을 갖고 들어오는 남편이 곱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터. “사람이고 물건이고 다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노후는 조용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이 박물관 운영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저분이 그렇게 좋아하고 또 수집품도 제법 많아졌으니 이젠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르잖아요”라고 말하는 부인 조경자 씨는 처음엔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마저 든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국가에서도, 민속학계에서도 하지 못한 일이다.

강진에서 모셔온 ‘관석헌’
아까부터 이곳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한옥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무리 봐도 처음부터 여기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다. 설명을 들어보니 조경자 씨의 친구인 화가 김승희 씨의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집으로, 지난 2003년 전남 강진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때때로 공연장으로 변하는 실내전시실. 2008년 11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본래 이 자리엔 다른 건물을 세울 계획이었지만 사람과 집의 인연이 참 재미있다. “친구 김승희한테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소방도로가 나게 되어 집을 할 수 없이 이전해야 한다고. 저도 어릴 적 그 친구 집에 놀러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아름다운 집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죠.” 

사용하기 편리하게 리모델링도 하지 않았다. “다 바꿔버리면 나중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떡하냐”는 김 관장의 뜻을 따른 것이다. 

한옥의 안과 밖은 그야말로 작품이다. 백두산 춘양목을 사용했고 경복궁을 지은 목수 김춘연이 지었다고 전해만 들었는데, 상량문에 편수 이름이 김춘연으로 나와 있는 걸 보고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쓴 신영훈 대목은 경복궁 연경당과 관석헌의 천장이 똑같다고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본래 이 집의 이름은 장춘실(長春室)이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관석헌(觀石軒)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유물이라 신경 쓰이긴 하지만 조용한 장소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빌려주기도 한다. 

관석헌 마루에 앉아 마당에 서 있는 옛 얼굴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누가 강진의 한 마을에 있었던 이 집 마루에 앉아보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또 오고 싶어질 것 같다고 하니 실제 사람박물관을 찾는 사람 중 상당수가 한 번 이상 왔던 사람이라고 한다.

한편 실내 전시관은 종종 공연을 위한 무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컬렉션들과 진열장 하단에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행사가 기획되면 계단은 객석이 되고 전시관은 넓은 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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