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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오지기행] 동화벽화마을 영월 모운동마을 구름이 모이는 마을엔 ‘행복 노다지’가 있다
[오지기행] 동화벽화마을 영월 모운동마을 구름이 모이는 마을엔 ‘행복 노다지’가 있다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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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영월] 불과 20여 년 전 ‘검은 노다지’를 캐며 휘황찬란한 불빛의 중심이었던 모운동은 세월 앞에서 작은 산골마을로 쇠퇴해버렸다. 그러나 최근 주민들의 노력으로 이 작은 마을을 하늘 아래 동화나라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그들만의 ‘행복 노다지’를 캐며 사는 모운동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본다.  

이곳을 오지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마을 입구가 좀 험한 산골이라고 해야 할까? 마을까지 들어가는 길은 좁긴 해도 포장 안 한 곳 없이 깨끗하다. 하지만 문제는 길의 난이도다. 망경대산의 똬리를 따라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은 둘째 치고, 1단 기어를 넣고도 차가 헉헉거리는 통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이 정도면 거짓말 조금 보태 지리산 노고단길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듯하다. 사람도 차도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지경이 되고 나서야 드디어 여기까지 오는 시험을 통과했다는 듯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며 노란 국화꽃을 선물로 안긴다.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집의 위치와 주인 이름, 사진까지 있는 친절한 마을 안내판.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모운동(募雲洞). ‘구름이 모이는 곳’이란 뜻이란다. 마을이 들어선 곳이 해발 650m라니 공기부터 다르다. 마을을 노랗게 물들인 국화 향기가 동네에 진동한다. 이렇게 진한 꽃향기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매연이 섞이지 않은 맑은 공기 덕분이다. 

무심코 마을 안내판을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각 집마다 실제 사진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 집 한 집 그 주인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래서 모운동에서는 찾아갈 사람 이름만 알면 굳이 길을 묻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친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런데 혹시 한 집이라도 이사를 가면 저 안내판은 다시 만들어야 하는 걸까.

“아이고, 어서 오세요. 찾기 힘드셨지요? 어찌 잘 찾아오셨는가요?”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김흥식 이장님의 첫 인사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마을을 찾기 어렵지 않았냐는 것이다. 

다행히 내비게이션이 있어 그리 헤매지 않았다는 말에 이장님은 “웬걸요, 그래도 중간에서 혹시나 해서 돌아가는 분들도 계세요”라며 혼자서도 잘 찾아온 것을 대견해 하신다.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벽 위 동화나라.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을버스정류소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주민들.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이장님은 요즘 좀 유명해졌다. 모운동이 동화그림벽화가 있는 마을로 인터넷에 뜨면서 중앙 일간지는 물론이고, 뉴스와 잡지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 마침 이날도 모 공중파 방송국에서 이장님을 촬영하고 있었으니, 유명인이 따로 없다. 

“작년에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사업을 신청해서 2000만 원을 지원 받았어요. 그 돈으로 벽화를 그리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외부 업체에 맡기려니 벽화만 1000만원이랍니다. 이정표도 세우려 했지요. 그런데 또 외주업체에선 몇 백 만 원이 든다 해요. 벽화와 이정표 세우는 데만 2000만원이 고스란히 다 들어갈 지경이었어요.”

예산이 부족했던 김 이장은 궁여지책으로 벽화와 이정표를 마을 자체에서 직접 해결하기로 한다. 마침 김 이장의 부인인 손복용 씨가 어린이집 교사 경력이 있어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 넓은 벽을 김 이장 내외만의 힘으론 할 수 없는 것. 밑그림은 김 이장의 부인이 그리고 색칠은 마을 주민들이 하기로 했다.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잘 그리고 멋있는 그림이었다면 이렇게 반응이 좋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여행객들은 마을 사람들이 그린 ‘못 그린 동화그림’이 더 좋다 하네요.”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을 뒷산의 광산 길.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모운동은 1970~1980년대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옥동광업소가 있던 곳이다. 그 당시 모운동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만큼 번성한 곳이었다. 이 비탈의 작은 동네에 영월에도 없던 극장이 ‘옥광회관’이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서 있었고, 우체국이며 병원, 시장, 술집, 양복점에 요릿집까지 있었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모운동을 ‘반(半)서울’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 당시 모운동은 ‘동네 개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던 곳’이라 했어요. 영월 읍내 사람들도 모운동으로 장을 보러 오거나 극장 구경을 하러 이 험한 산을 올랐으니 대단했지요. ‘간조날(월급날)’이면 모운동이 들썩들썩했어요. 영월 상인들이 모운동으로 올라와 진을 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2살 때 부모님을 따라 모운동으로 들어왔으니 이곳 토박이나 다름없는 김 이장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진다. 

“출근 시간, 식사 시간 등이 되면 광산에서 ‘동백 아가씨’ 노래를 틀어줬어요. 민가엔 시계가 없고 광산엔 큰 시계가 있으니까 일종의 ‘시보’였던 거죠. 아, 그런 이야기도 있었어요. 외지에서 시집오는 색시들은 첫날밤에 네 번 놀란다는.”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폐광된 광산.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사랑을 따라, 어쩌면 부(富)를 따라 모운동으로 들어왔을 처녀들은 버스를 타고 올 때 꼬불꼬불, 오르막내리막 정신없는 길에 한 번 놀라고, 저녁 무렵 사치재를 넘어오며 휘황찬란한 모운동의 불빛에 두 번 놀라고, 첫날밤을 보낸 후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번쩍였던 불빛은 다 어디로 가고 함석집만 남았냐며 세 번 놀라고, 마지막으론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자기 집을 못 찾을 정도로 집들이 똑같이 생겨서 놀란단다.

그렇게 번성하던 모운동도 1989년 4월 옥동광업소가 문을 닫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불과 20여 년 만에 거짓말처럼 1만 명의 주민이 40여 명으로 줄었다. 극장이며 병원 등 빼곡히 들어서 있던 건물들은 모조리 헐렸다. 그 번성했던 마을이 마치 12시가 넘어 마법이 풀린 동화나라처럼 볼품없는 산골 오지마을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김 이장을 선두로 마을 주민들이 뜻을 함께 해 마을 살리기를 시작했다. 버려졌던 집들에 그림을 그려 동화의 집을 만들었다. 폐교되었던 모운초등학교 건물은 ‘하늘아래 펜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농협 건물은 모운자료관으로 탈바꿈했고, 마을 곳곳의 길은 꽃길로 바뀌었다. 

“마을 한 바퀴 돌아보시겠어요?”
그거 걸어서 한 바퀴 돌아보자는 말로만 알았건만, 이장님은 사륜 봉고차 뒤에 오르라 한다. 그러더니 ‘길이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산길로 차를 내몬다. 간신히 차 한 대 들어가는 길엔 나무가 빼곡히 자라 있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들고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나뭇가지가 볼따구니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기암절벽에 세워진 만경사.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이 길이 광산길이에요. 이 길로 물건을 나르고 사람도 다니고 트럭도 다니고 다 했어요.” 
지금은 산짐승이나 다닐까 한 이 길이 과거엔 번듯한 광산길이었다니 세월의 무상함이 전해진다. 울퉁불퉁 궁둥이에 멍이 들어가며 도착한 곳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옛 광산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백 명의 광부들을 집어삼켰다 뱉어냈을 검은 노다지 동굴은 이제 아무런 쓸모도 없는 폐광으로만 남아버렸다. 그 옆의 목욕탕 건물 또한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옛 영화를 추억하며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들도 머지않아 김 이장의 마법이 걸릴지도 모른다. 

“목욕탕 건물은 그래도 아직 쓸만해 허물지 않고 놔뒀어요. 동굴 쪽으로 구멍을 내면 냉풍욕장으로 활용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겨울엔 온풍욕장이 될 거고요. 폐광도 그냥 버려두진 않을 거예요. 레일을 다시 깔아서 레일바이크 체험을 할 수 있게 할 예정입니다. 광산이었던 이곳 모두가 이제는 산업자원에서 관광자원으로 변한 거지요.”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이장님 댁에 마실나온 할머니들. 2008년 1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김 이장은 나름대로 명소도 발견했다며 안내해준다. 만경산 자락에 꼭꼭 숨겨져 있는 만경사는 20여 년 전 광부들이 주로 다니던 암자다. 이곳은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산 아래 입구부터 절까지 등불이 촘촘히 불을 밝혀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다. 이곳에서 탄부를 가장으로 둔 아낙들은 남편의 무사를 기원하며 불공을 드렸을 터이다. 

또 다른 명소는 못 쓰는 석탄 찌꺼기를 버리던 곳인데, 길 옆에 불쑥 솟아 있는 바위봉우리 위를 조심조심 오르면 100m 넘게 깎아지른 벼랑을 내려다볼 수 있다. 김 이장은 이곳을 ‘모운동 그랜드캐니언’이라 이름 붙이고 전망대를 만들 계획이란다.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보자고 나선 길에 어느덧 해가 져버린다. 고작 지금의 마을 한 바퀴가 아니었다. 그만큼 모운동은 큰 마을이었음을 직접 나서보고서야 깨닫는다. 

마을로 내려오니 불빛 하나 없이 조용하다. 새색시가 보고 놀랐다던 그 불빛들은 이제 없다. 하지만 모운동의 불빛은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씩 불을 옮기며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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