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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갈대 여행] 해남 고천암호 갈대숲 일렁이는 갈대숲 사이로 겨울 여정이…
[갈대 여행] 해남 고천암호 갈대숲 일렁이는 갈대숲 사이로 겨울 여정이…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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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일렁이는 갈대가 강한 인상을 남긴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해남]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접경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갈대숲엔 바람과 갈대만이 남아 저물어가는 겨울의 여정(餘情)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가을을 시작으로 늦겨울까지 운치 있는 갈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여느 여행보다 차분하다. 여느 여행지처럼 사람들이 북적대는 것도 아니요, 고천암 갈대숲은 인공적으로 보기 좋게 꾸며진 갈대숲이라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에 눈으로 여행을 즐기기보다는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봐야 할 듯하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드라이브 길 중간에 건너는 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해남에서 진도로 가는 18번 국도를 탄다. 읍내에서면 모를까, 국도에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평소 꽉 막힌 길을 당연시 여기는 도시민에게 이 한적함이 어색하기만 하다. 차 창문을 열고 그 한적함과 함께 뺨을 차갑게 내리치는 겨울 바람을 만끽하노라면 이윽고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장장 180만㎡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갈대밭에 이르게 된다.  

고천암호는 원래 갯벌이었던 것을 지난 1981년 고천암 방조제를 만들어 물줄기를 막고 간척지로 개발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호수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태초의 자연 모습 그대로지만, 고천암호는 거대한 깔때기 모양으로 펼쳐진 인공호수이다. 

이 인공호수는 해남읍과 화산면을 지나 황산면 일대까지 광활하게 펼쳐지며 습지와 갈대숲을 만들어 이 무렵이면 무수한 겨울 철새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고천암 갈대숲에서는 저녁 무렵 달력 그림과도 같은 가창오리 떼의 군무를 볼 수 있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추수를 끝낸 황량한 논.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갈대숲에 도착했으나 그 어디에서도 갈대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는 추수 후 황량해진 논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어른 키만 한 제방이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갈대숲이…. 궁금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제방을 올라본다. 

“아, 여기다!” 
제방 아래로 펼쳐진 빼곡히 흩뿌려진 갈대숲. 바로 이곳이 영화 <살인의 추억>과 <서편제>에서 본 그 갈대숲이다. 갈대가 너무도 빼곡해서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가기조차 겁이 난다. 길이 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참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한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모험을 강행하기보다는 일단 갈대숲을 빙 둘러 나 있는 길을 차로 달려보기로 한다. 일명 ‘고천암 드라이브 길’이다. 고천암호를 두르는 갈대군락은 둘레만 14km는 족히 이른다. 다행히 이 둘레를 차로 유유히 달릴 수 있게 만들어놓아 시시각각 다른 시점으로 갈대를 볼 수 있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갯벌을 갈대숲으로 바꿔놓은 고천암 방조제의 수문.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둘레 길은 아스팔트로 잘 되어 있다. 제방과 논을 양쪽에 두고 달리는 길도 있고, 작은 강을 아래에 두고 다리를 건너는 길도 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작은 일탈을 감행한다면 갈대숲 사이로 펼쳐진 좁은 농로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행히 이 즈음이면 논일이 모두 끝나 이 작은 길은 여행객에게도 여유 있게 허락된다. 둘레 길과 달리 농로는 갈대숲 사이로 나 있기 때문에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 웬만한 내비게이션에도 이 길은 표시되지 않기에 일단 길로 들어서면 마음을 비우고 앞으로 나가기만 하는 것이 속 편하다. 하지만 중간에 길이 끊기거나 영영 큰길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일은 없으므로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갈대숲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갈대 바다에 빠진 듯한 착각이 인다. 넘실대는 갈대들은 파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앞과 뒤만 보일 뿐 좌우로는 갈대로 가로막혀 그 너머의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좋은 건 오지 중의 오지라는 곳에도 어김없이 들어서 있는 전봇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겨울이면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촤르륵’ 갈대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차 안에서 책 한 권을 읽어도, 늘어지게 낮잠을 자도 누구 하나 ‘궁상떨고 있다’며 말릴 이는 없을 것 같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일기를 한 장 빼곡히 써도 좋을 듯하다. 이렇듯 한 무더기의 여정(旅情)을 마음껏 풀어내도 좋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청둥오리들이 떼를 지어 헤엄을 치고 있다. 매년 겨울이면 기러기 등과 같은 새들도 천수만을 거쳐 이곳으로 온다. 대략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가 무려 40여만 마리라고 하니, 생태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짧은 해가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지평선 아래로 지려 한다. 붉은 낙조가 하늘 캔버스 위에서 넓게 퍼진다. 먹이를 구하러 갔던 철새들도 보금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여기저기서 작은 군무를 펼쳐 보인다. 

고천암호는 사진작가들 사이에선 새들의 군무를 담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우선 철새의 개체 수가 월등히 많은 것은 물론이고, 갈대를 배경으로-그것도 눈엣가시인 전봇대가 하나도 없는- 곳곳에서 군무를 담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고천암 주위엔 염전이 많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사실 철새가 많이 물려드는 또 다른 철새도래지인 금강하구둑과 영암호, 금호호 등은 사진 촬영 포인트가 광활해 전문가가 아닌 이상은 그 모습을 포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고천암호에서는 조망 포인트가 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굳이 이곳이 아닌 곳에서라도 쉽게 철새들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이에 더해 조금 더 있으면 고천암호의 겨울 풍경 하나가 더해질 것이다. 갈대들이 늦은 꽃을 틔우며 솜처럼 부풀어 오른 솜털을 날려 함박눈을 내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선보이는 함박눈을 맞으며 한 해를 차분히 시작하는 일도 고천암 갈대숲에서 꼭 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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