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느리게 걷기] 주말마다 가족끼리 달팽이 행진 그렇게 빨리 가다간 예쁜 꽃 한 송이도 못 보고 넘어져요 
[느리게 걷기] 주말마다 가족끼리 달팽이 행진 그렇게 빨리 가다간 예쁜 꽃 한 송이도 못 보고 넘어져요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05.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하나 둘 셋 넷’ 줄을 맞춰 즐겁고 느리게 행진하자.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경기]인간은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자전거를 만들고 자동차와 비행기도 만들어냈다. 1분1초가 돈이 되고 경쟁력이 되는 이 시대에 느리게 걷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말마다 ‘달팽이 행진’이란 이름으로 흙길을 밟으며 자연을 꿈꾸는 이준하 씨와 회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놀토’날. 오전 10시를 가리키는 이 시간에 한참 늦잠을 자고 있으련만 고양시 주교동 마상공원엔 웬일로 아이들의 즐거운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하나둘씩 모인 아이들은 느리게 걷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달팽이 행진’ 회원들이다. 달팽이 행진은 어린이도서관 책놀이터라는 인터넷 카페에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진행하는 걷기 모임이다. 

“제가 아들만 둘인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화도 없어지고 자꾸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2007년 8월에 저와 아내, 두 아들이 처음으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달팽이 행진의 시작이었지요.”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벚꽃비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달팽이 행진을 만들고 지금까지 행진을 진행하고 있는 이준하 씨를 부르는 명칭은 ‘달팽이 회장’이다. 걷기 행사가 있을 때는 ‘대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준하 씨는 느리게 걷기를 시작한 후 가족의 화목은 물론, 건강까지 얻게 되었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앓고 있던 그가 걷기를 시작한 후 일년여 만에 약을 끊게 된 것. 바쁘게 살려고 하다가 얻은 병을 느리게 살면서 고친 셈이다.    

“처음에 8월의 뙤약볕 아래를 4시간 정도 걸었어요. 저는 물론이고 아내와 아이들도 파김치가 되어버렸지요. 하지만 그 첫 행진 이후로 우리 가족이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좋은 행진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눌 수 없을까 생각했고, 제가 알던 인터넷 카페에 방을 만들고 공지를 띄웠어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달팽이 행진방은 2008년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온 가족 건강 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부모와 아이들간에 대화가 많아지니 가정의 행복 지킴이 노릇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10시가 조금 지나 행진이 시작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이 알아서 줄을 맞춰 선다. 한두 번 해보는 행진이 아니니 스스로 질서란 것을 터득한 것이다. 이런 때는 아이들이 오히려 어른보다 의젓해 보이기까지 한다.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달행이 행진에서 피킷은 필수지요.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흙을 밟으며 노는 아이들.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줄을 선 아이들이 주섬주섬 무엇을 꺼낸다. 뭔가 싶어 살펴보니 상자를 뜯어낸 종이에 삐뚤삐뚤 쓴 나름의 ‘캠페인 문구’다. 지윤이는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니자’란 글을 썼고, 수민이는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자’란 글을 썼다. 다분히 엄마의 영향이 눈에 보이는데도 아이들은 자기가 생각해서 썼다며 의기양양하다. 

공원을 걷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장난은 끊이지 않는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맞으며 학교가 아닌 야외로 가는 길이 즐거울 수밖에…. 곳곳에 알록달록 핀 꽃들은 아이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장난감이다. 

“엄마, 이건 철쭉이 아니고 진달래지요? 지금은 진달래가 피는 달이지요?”라며 제법 알은체하는 지윤이는 평소에도 길에서 피는 꽃 이름을 척척 알아맞히는 덕에 아이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줄곧 받곤 한다. “책을 보고 배운 꽃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달팽이 행진을 하면서 본 꽃들이 더 많아요”라고 말하는 지윤이의 교과서는 책이 아닌 자연이다.  

“처음에는 모임의 이름을 ‘아이와 함께하는 국토순례’로 지으려 했어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천천히 걸으면서 새로운 풀과 꽃, 곤충들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달팽이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달팽이 행진’으로 이름을 지었지요.”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달팽이 행진을 함께하는 회원들이 모두 모였다. 2009년 5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지난해 겨울, 눈이 많이 오던 날에는 배다리박물관 근처를 걷다 일곱 가족이 뒤엉켜 눈싸움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난 눈싸움에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눈구덩이에서 뒹굴며 놀았단다. 지금도 아이들은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며 올해도 어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단다. 일상에서 일어난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아이들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달팽이 행진의 코스는 되도록 아이들이 흙을 밟을 수 있고 풀과 나무, 곤충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을 택한다. 다행히 고양시에는 이런 흙길과 논길이 많아 코스를 잡기 수월하다. 요즘은 주말농장에 땅을 빌려 농작물을 기르고 있어 주말농장으로 향하는 길이 달팽이 행진의 주 코스가 되고 있다.  

“주말농장까지 가는 데 집결지에서 걸어서 1시간 정도가 걸려요. 아이들에게 걷기도 하면서 농장에서 직접 채소와 곡식을 기르는 체험을 시키고 싶어 시작했지요. 4월에 씨를 뿌리고 5월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돌봐주려고 해요.”

빠르게 걷고,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자 수단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그렇게 달팽이들은 느리게 걸으며 세상을 더 알차게 보려 하고 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자꾸만 일행을 앞서 나가려는 걸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나도 가끔은 달팽이가 되어보자고 다짐하며 뒷짐을 지고 느리게 걸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