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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버스여행] 사천과 남해 잇는 25번 버스 푸른 바다와 섬이 발아래에 
[버스여행] 사천과 남해 잇는 25번 버스 푸른 바다와 섬이 발아래에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06.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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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사천에서 남해로 가는 버스.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사천]사천에서 남해에 이르는 길은 삼천포대교와 녹도대교 등을 지나는 소문난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을 하루에 8번 왕복하는 버스가 있다. 구름처럼 바다와 섬을 아래에 두고 달리며 일명 ‘한려수도 버스’라고 불리는 25번 버스가 그 주인공이다.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12시 50분발 25번 버스를 타려고 표를 끊었다. 갖다 대기만 하면 ‘삑’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요금이 계산되는 교통카드가 대부분인 요즘, 가판대의 주인아저씨가 손으로 찢어서 건네는 자그마한 종이딱지 버스표가 반갑다. 하지만 버스는 말끔한 요즘 버스다. 당연히 툴툴거리는 옛날 버스가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지라 오히려 이쪽이 더 낯설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청산에서 바라본 섬들.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침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는 시간이어서 버스 안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찐~한’ 사투리가 섞였을 뿐, 재잘재잘 가수 이야기며 학교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여느 도시의 시내버스와 다를 바 없다.  

버스가 첫 번째 정류장인 중앙시장에 도착하자 읍내로 마실 나오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거 버스에 오른다. 순간 버스 안이 분주해진다. 학생들은 당연한 듯 서로 자리를 양보하는데, 열이면 열 일제히 그렇게 자리를 양보하니 버스가 들썩들썩한다. 조는 척, 못 본 척 새침을 떠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나만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내 앞으로 오신 할머니는 자리를 양보하려는 나를 한사코 물리치고는 “괜찮네. 학생이 앉아 있게. 난 여기 앉아 갈라네”라며 까만 비닐봉지를 바퀴가 튀어나온 부분에 깔고 앉으신다. 그러고는 “야야~, 여기 자리 있다”며 두 명의 친구 할머니들을 이쪽으로 부른다. 다른 할머니들도 짐수레를 의자 삼아 앉으신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서 그런 모습이 눈에 띈다. 이 버스에선 의자만을 자리로 쳐주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디든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좌석’인 셈이다.  

사진 / 손수원 기자
툴툴거리는 시골 버스가 아닌 어엿한 최신 공영 버스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어지께 몸이 빠사질라 카는데도 인나서 할 점도록 농약을 뿌리 놨는데, 오늘 이리 날씨가 흐리뿌고 낼부텀은 비가 온다카이 영 파이다.”
“그랑께 테레비를 보고 약을 치야지요. 집에 테레비 놔뚜고 뭐할랑가?”
“가들이 날씨를 이리 잘 맞출 줄 알았나….”

불쑥 할머니들 앞으로 자리를 옮기신 할아버지는 ‘갱상도 싸나이’답지 않게 앓는 소리부터 뱉어낸다. 오늘도 어제 무리를 해서 하도 허리가 아파 병원에 들렀다 가는 길이라 한다. 할아버지는 비 오기 전날 약을 친 것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다 “아, 그랄라믄 담부텀 약 치기 전에 우리한테 먼저 물어보고 치소”라는 할머니들의 핀잔에 주눅이 들어 “그라믄 그라든가…, 에헴” 하시고는 차창 밖의 흐린 하늘만 쳐다본다. 50년 경력의 베테랑 농사꾼 할아버지가 순식간에 초보 취급을 받는다. 

차창 밖의 사천 시내는 평일인데도 분주하다. 5일장인 장날은 어제였는데 길가엔 과일장사며 옷장사가 여기저기 좌판을 늘어놓고 있다. 중앙시장과 부둣가엔 5일장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짐 보따리를 가득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와 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하는 꼬마는 모습은 다르지만 나름대로의 분주한 사정은 매한가지다. 할머니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에 가서 비가 오기 전에 논에 고랑이라도 내야겠기에 마음이 바쁘고, 꼬마들은 엄마의 지갑이 열리는 틈을 타서 핫도그 하나라도 얻어 먹어야겠기에 눈이 분주하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장날이 지났는데도 곳곳에서 좌판이 벌어진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사진 / 손수원 기자
오늘 산 채소며 생선은 자리 옆에 가지런히. 사진 / 손수원 기자

선구동을 거쳐 부두에 이르는 동안 학생들은 거의 다 내리고 버스 안에는 노인들만 오롯이 남았다. 시장에서 사온 양파며 마늘에 부두에서 사온 생선까지 모이니 버스 안은 작은 시장터를 방불케 한다. 양파의 매운 냄새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 생선의 비린내까지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진동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냄새가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세 할머니 중 두 할머니는 어느샌가 맨 뒷자리로 가서 앉으셨다. 나는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아 할머니께 다시 한 번 자리를 양보한다. 

“그래, 그라믄 내가 앉을라네. 궁디가 아파서 안 되긋네.”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처럼 “그래, 젊은이가 고생이 많네” 하시며 자리에 앉아 가방을 대신 들어주시다 할머니는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의자가 아니어도 앉을 자리만 있으면 그게 좌석이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서울서 왔어요. 이 버스 타보러 일부러 왔어요”라는 말에 할머니는 “하이고마~, 서울에는 버스가 없는가베?” 하시며 아까 그 친구 할머니들에게 큰소리로 “이 학생이 서울서 버스 타보로 여까정 왔다카네” 소문을 내신다. 할머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일제히 쏠린다. 장난기 섞인 할머니의 갑작스런 놀림에 나는 땀을 삐질 쏟아내며 거의 울 지경이 되어버렸다. 아까 그 농약 할아버지의 심경이 이런 것이었지 싶다.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 시내를 빠져나오자 버스 앞 유리로 거대한 다리의 모습과 함께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것은 하나의 다리지만 남해로 건너가는 사이엔 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단항교가 놓여 있다. 불과 3~4분 사이에 5개의 다리를 건너는 셈이다.  

창문 아래로는 작은 마을의 모습이 바둑알처럼 작게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검푸른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크고 작은 섬이 수제비처럼 둥둥 떠다닌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 창문에 붙어 있다시피 하는데, 이 버스에 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창밖 풍경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
“저 봐라 저. 저가 학섬이라. 겨울 되면 백로니 왜가리니 마이 온다.”

방금 나를 놀린 김순심 할머니가 지나가는 섬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신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바다와 어우러지는 농촌마을의 풍경. 사진 / 손수원 기자

할머니는 남해에 딸린 작은 섬에 사시는데, 요즘 무릎이 안 좋아 일주일에 두 번씩 사천에 있는 병원에 다니시는 중이란다. 25번 버스는 그런 할머니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다. 얼마간은 하루에 16번 다니다가 작년 12월부터 8번으로 줄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기름값이다 뭐다 해서 수지타산이 안 맞았던 모양이다. 때문에 할머니도 예전보단 시내에서 머물 시간이 줄었단다. 그렇지 않아도 버스를 두 번 타고 배까지 타야 하는 할머니의 여정에 25번 버스의 배차 간격이 2배가 되었으니 마음이 조급해져 얼른얼른 일을 보고 남해로 넘어가신다. 

김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뭔가 더 설명을 해주려고 하시지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신다. “여 뭐 볼 끼 있나. 매 바다고 산이지”라는 말이 전부이다. 하긴 몇 십 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특별하게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리라. 

사천에서 남해 지족까지 이르는 이 길은 3번 국도의 일부인데, 휴전선 이북부터 시작되는 3번 국도의 남쪽 끝을 바로 25번 버스가 달리고 있는 셈이다.특히 사천에서 남해 미조에 이르는 구간은 해안과 나란히 하며 산과 바다를 번갈아 지나는 3번 국도의 백미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의 “매 바다고 산이지”라는 대답만큼 이 구간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단항교를 지나면 바다는 잠시 모습을 감추고 여느 산골마을과 같은 풍경으로 바뀐다. 이곳이 바닷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다의 짠 냄새뿐. 날씨가 흐리지만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바닷냄새를 맡아보려 코를 킁킁대지만 마침 논밭에 뿌린 거름의 ‘찐한 향기’만이 날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선잠에 빠지셨다. 이 시간의 버스를 타려면 아침 첫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와 분주하게 일을 보셨을 게다. 그 고단했던 하루가 녹아 있는 버스 안은 나른하다. 나 또한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흔들리는 창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25번 버스가 지나는 삼천포대교와 녹도대교. 사진 / 손수원 기자

시내에서 사람들이 내리면 그 이후로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마지막 다리인 창선대교를 지나 삼동면사무소 정류소에 이르자 그나마 거의 모든 승객이 내리고 버스엔 나와 김 할머니만이 남았다. 할머니는 종점인 지족에서 내려 또다시 남해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단다. 아직 종점에 이르지 않았지만 김 할머니는 서울에서 온 ‘도시 촌놈’이 길이라도 잃을까봐 연신 조심해서 돌아가라며 인사를 하신다.  

드디어 종점인 지족에 이른다. 할머니는 버스에서 내려 길가의 간이정류소로 가셨고, 나는 홀로 버스에 남겨졌다. 사천에서 지족 종점까지 정확히 37분이 걸렸다. 지족에서 출발하는 시각이 오후 1시 30분이니 종점을 돈 버스는 쉬지도 않고 다시 달린다. 

다시 창선대교를 건너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지라 시골사람들의 훈훈한 정이 오가던 조금 전 광경이 자꾸만 떠오른다. 새로운 사람들이 버스에 타면서 버스 안은 금세 채워졌지만, 할머니가 “매 바다며 산이지”라고 했던 풍경들은 하나 달라진 것 없이 차창 밖에서 사진처럼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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