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영덕]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대게를 찾아 모인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영덕. 한여름을 목전에 두고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숨을 고른다. 인적이 드문 바다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고, 갯내를 머금은 해송림은 조용히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평화로운 휴가를 꿈꾼다면, 지금 바로 영덕의 차유마을을 권한다.
영덕이 인정한 대게 원조마을
‘그대 그리고 영덕’이란 팻말이 영덕 시내 곳곳에서 외지인을 반긴다. 기억을 더듬어 10년 전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속 그곳과 차창 밖의 배경을 포개어보던 찰나, 언덕 사이로 쪽빛 파도가 생생하게 넘실댄다. 영덕은 10년 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로 지명과 함께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영덕의 특산물인 대게의 주가도 함께 치솟으면서, 제철 대게를 찾는 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영덕에서도 가장 먼저 대게를 잡기 시작한 마을은 어디일까? 바로 경정2리 차유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대게 원조비’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이곳은 영덕군수도 인정한 ‘원조 중의 원조’다. 고려 때 영해부사 일행이 대게의 산지인 이곳을 둘러볼 때 수레를 타고 넘어 왔다 해서 붙은 ‘차유(車踰)’라는 마을 이름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게축제 하기 전에 여서 기원제를 지내고 시작한다카이. 우리 마을 선조들이 고려 때부터 돛배 타고 먼 바다로 나가가 대게를 잡았던 기라. 그 대게를 태조 왕건 수라상에 올린 기고. 한마디로 대게로는 여가 진짜 원조라 안 하나.”
차유마을의 김복식 어촌계장은 ‘대게 특구’로 거듭난 경정2리에 갖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실로 살이 꽉 들어찬 영덕 대게는 한철 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찾아와서 먹는 이들도 많지만 택배 주문량까지 더하면 대게 양이 모자랄 정도란다.
대게 철에 한참 북적였을 마을은 지금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다. 푸르다 못해 검은 바다를 마주하며 갯바위에 걸터앉았다. 바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자잘한 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연초록색 해초도 송송 솟아있다. 그 위에 영덕 대게의 미니어처쯤 되는 꽃게가 꿈틀거린다. 작고 귀여워 손바닥 안에 넣어보고 싶은데 어찌나 재빠른지 손에 넣기가 영 쉽지가 않다. 고개를 들면 햇살이 잘게 부서지는 바다, 그리고 푸르디푸르러 경계조차 불분명한 수평선이다. 이 풍경 하나만으로도 지금 영덕에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영덕의 바다를 즐기는 네 가지 방법
바닷가에 흐르는 정적을 깬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바지를 걷어붙이고 바로 입수한 모양이다. 아이들은 물을 튕기며 쉴 새 없이 재잘재잘 즐겁다. 과연 물이 맑아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지라 물고기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또 해초 한 주먹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친다. 재미가 좋은지 제 웃음에 꼴깍꼴깍 넘어간다. 고요했던 바다에 화색이 돈다.
차유마을 앞바다의 깊이는 아이들이 놀기에 딱 좋은 정도. 고운 모래가 퍼진 해수욕장은 아니지만, 종아리 깊이의 해변이 넓게 펼쳐져 물놀이를 하기에 좋다. 여기에 몸을 푹 담그고 수경을 쓴 채 신비의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해상 체험 또한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물이 맑아 떼를 지어 유영하는 고기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차유마을의 바다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으로 똑딱선 유람을 빼놓을 수 없다. 거센 파도에 맞서기엔 가냘퍼 보이는 똑딱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배가 워낙 작아 일렁이는 파도와 배가 마치 한 몸이 된 느낌이다. 한참 동안 넘실대는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해파리처럼 둥실둥실 떠다녔다.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마치 섬처럼 보이는 죽도산을 보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배를 포구에 대고 해송 숲으로 향했다. 갯바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들에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말미산 해안산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낮은 구릉에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 그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여백을 메우는 바다 풍경이 시원스럽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 숲, 그 속을 통과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수록 기분이 맑아진다. 나무도 호흡하고 바다도 함께 숨을 쉬는 듯하다.
왕복 1시간 남짓, 해송 삼림욕을 하고 마을로 돌아오니 벌써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바다 앞 한옥‘어촌살림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어촌계가 운영하는 ‘어촌살림집’은 낮은 토담이 빙 둘러져 있는 아늑한 전통체험 가옥이다. 주방, 화장실, 방 세 칸까지 모두 깨끗하다. 이름처럼 살림살이가 모두 갖춰진 것은 물론이고 넓은 마당도 품고 있다. 마당에는 운치 있는 테이블과 바비큐 기구가 갖춰져 재료를 준비해 파티를 벌여도 좋겠다. 공 들여 만든 만큼 체험객들에게 요사이 최고의 인기를 누린단다.
창호지 바른 문을 열어젖히니 파도가 대청마루까지 밀고 올라올 듯 바다의 기운이 생생하다. 한옥에 고단한 몸을 뉘이고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잠을 청했다.
삶의 기운이 펄떡이는 축산항
숙면을 취한 덕분에 이튿날 새벽이 가뿐하다. 기지개를 쭉 켜고,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축산리수협 위판장으로 향했다. 드라마 <식객>의 성찬이 최고의 해산물을 사기 위해 들렀던 바로 그곳이란다.
경매 시작은 새벽 5시. 이른 시간이라 눈꺼풀이 축축 처지는데, 이곳 사람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방금 잡아 올린 바다메기며, 아귀며, 팔딱이는 생선들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벌여놓으면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경매가 시작된다. 상인들이 모여들어 각자 원하는 가격을 적어 경매사의 눈앞에 살짝 공개하고 번호판을 가린다. 가격을 숨기는 것에 어찌나 열심인지 슬쩍 보려 해도 보일 리가 없다. 상인들이 원하는 가격을 모두 확인하고 난 경매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37번 8만9800원!” 하는 경쾌한 외침으로 경매의 끝을 알린다. 37번 상인이 낙찰이다.
원하는 물건을 차에 실은 상인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순식간에 위판장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야 위판장 너머 축산리 포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엔 생선 비린내와 사람의 살 냄새가 뒤섞인 정겨운 풍경과 더불어, 삶의 기운을 북돋는 놀라운 힘이 넘치고 있었다.
다시 차유마을까지는 차로 5분 남짓. 가는 길에 구름 사이를 비집고 대게의 등딱지를 쏙 빼닮은 해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다시 마을의 모습이 차츰 드러났다. 잠시 차를 멈추고 소박한 어촌의 풍경에 취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