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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자전거 타고 한강 여행] 청계천 제1지류 정릉천 울긋불긋 꽃동네, 왕가 흔적 가득
[자전거 타고 한강 여행] 청계천 제1지류 정릉천 울긋불긋 꽃동네, 왕가 흔적 가득
  • 김대홍 기자
  • 승인 2009.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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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정릉천을 달리다 만난 꽃동네. 사진 / 김대홍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정릉천은 발원지 쪽에 정릉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릉은 조선 태조의 첫 왕비인 신덕왕후가 묻힌 곳이다. 정릉천은 지금 대부분 복개돼 물을 볼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악취가 심해 주민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청계천 이후 하천 복원은 대세가 됐다. 정릉천 관할 지자체는 새로이 자연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 중이다. 그곳을 찾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15세 되던 해 <어린이> 4월호에 발표한 시에 이일래와 홍난파가 곡을 붙인 노래다. 서울 동북쪽을 흐르는 정릉천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때로는 끌면서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눈 주위로는 꽃이 지천이었고, 꽃은 연신 서울 서북쪽 인왕산에서 온 사내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주차장보다는 공원을 더 선호하는 시대가 도래하여 버려졌던 하천이 다시 정비되고 있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청계천 제1지류인 정릉천은 북한산에서 시작하는 천이다. 하월곡동에서 월곡천과 만나 몸을 키운 뒤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청계천은 다시 중랑천과 만나고 얼마 더 가서 한강으로 이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도랑을 만들고 아래로 내려가다 개울이 된다. 개울은 시내가 되고 시내는 내로 이어지며, 내는 다시 강으로 커진 뒤 바다로 흘러간다. 정릉천은 토박이말로 한다면 정릉내가 될 것이다.

야트막한 주변 집, 기찻길 옆 풍경 떠올라
지하철에 자전거를 싣고 가다 용두역에 내렸다. 접이식이라 타는 데 문제없지만 올해 10월부터는 아무 자전거나 실을 수 있을 전망이다. 서울시가 지하철 전용칸을 만들겠다고 얼마 전 발표했기 때문이다. 역에서 내려 자전거를 편 다음 차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좁은 골목은 오롯이 걷는 사람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차지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천 한가운데 큰 기둥이 잔뜩 박혀 있다. 내부순환도로를 지탱하는 다리다. 지금 홍제천이 그렇고, 과거 청계천이 그랬다. 개발 기운이 하늘을 찌를 무렵 천은 쓸모없는 곳일 뿐이었다. 뚜껑을 씌워서 주차장을 만들거나, 기둥을 박아서 고가도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면 가치도 달라지는 법, 천을 주민 휴식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다. 지난해 8월 28일 시작해 내년 2월 19일 끝낼 예정이다. 1420m를 꾸미고, 2500m에 이르는 산책로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물은 까맣다. 공원화 작업이 끝나면 물 색깔도 훨씬 밝아져 있을까. 놀라운 사실은 가까이 가기도 싫을 정도로 탁한 물인데도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래톱 끝에 선 중년 남자 두 사람은 선 채로 낚싯대를 던졌다. 뭘 낚았는지 낚시통이 없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오리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오리 가족들이 정릉천에서 단체로 노는 모습을 봤다. 그 태평함에 그만 긴장이 풀어진다. 

집이 눈에 들어온다. 정릉천 주변 집은 대부분 낮다. 기찻길 옆 풍경이 떠오른다. 때가 되면 전국 천변 동네와 기찻길 옆 동네를 찾아다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 옆에서 뻥튀기 장수를 봤다. 대기업에서 만드는 달콤한 먹을거리들이 널렸는데도 여전히 이런 먹을거리가 팔린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정릉천 주변을 따라 서있는 집들. 정릉천이 마당이고 정원이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천 옆엔 동대문구청장 이름으로 경고문이 붙어 있다. 비가 잔뜩 내릴 때 노숙을 포함해서 하천 출입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천에 노숙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이런 경고문까지 붙였겠지. 지금 천을 다니는 내내 노숙한 흔적은 전혀 볼 수 없다. 자연공원화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자재를 쌓아놓고 삽질을 하니 노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차도를 달리다 자동차 두 대도 다니기 힘든 좁은 골목길로 접어든다. 좁은 골목길은 천이 끝나는 부분까지 쭉 이어진다. 길이 좁으니 분위기가 무척 여유롭다. 자동차들은 주차돼 있을 뿐이고, 학교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길을 걷는다. 이따금 걸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자전거가 지나간다. 한가로운 속도다. 

어느 순간 꽃들이 잇따라 뽐내기를 한다. 벽에도 붙어 있고, 길가에도 늘어서 있다. 천 옆 둑에도 화분이 올려져 있다. 자전거에서 내렸다. 꽃들을 하나씩 보려면 자전거는 너무 빠르다. 꽃 이름을 모르는 나는 열심히 눈에 담고 사진기 셔터만 누를 뿐이다. 시골에서 놀던 어린 시절 열심히 꽃 이름을 외워두었다면 참 좋았으련만.

사진 / 김대홍 기자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그럼에도 여전히 뻥튀기는 인기다. 사진 / 김대홍 기자

둑 위에 누군가 바구니를 놔두었다.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자두씨다. 저 자두씨로 뭘 할 생각일까. 주변엔 물어볼 사람도 없다. 

달리다 보니 어느 표지판은 ‘정릉천길’, 어느 표지판은 ‘정릉내길’이라고 돼 있다. 내는 천의 우리말이다. 천보다는 내가 어감이 좋다. 이왕 표지판을 만든다면 한자말과 한글을 섞어 쓸 게 아니라 정릉내로 통일하는 게 어떨까 싶다. 

세종대왕기념관, 과거 명성황후 능…왕가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
잠시 옆길로 샌다. 조선시대 왕가의 흔적을 잔뜩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세종대왕기념관에 들어간다. 영조 25년(1749년) 청계천 물높이를 재기 위해 만든 수위측정기인 수표, 측우기를 볼 수 있다.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뛰어난 창작품이다. 옆엔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영휘원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이며, 숭인원은 의민황태자 이은의 큰아들 이진의 묘다. 

사진 / 김대홍 기자
동네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기 위해 자전거에서 내렸다. 사진 / 김대홍 기자

근처엔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인 홍릉수목원이 있다. 과거 조선왕조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있어 지금과 같은 이름이 붙었다. 홍릉은 지금 경기도 금곡으로 옮겨져 터만 표시돼 있다.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능을 옮겼는데도 아직 곳곳에 홍릉이란 이름이 남아 있고, 지역 사람들도 홍릉이라고 부르는 게 신기하다. 이름이 지닌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생각한다.

길 건너 청홍동은 사람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 동네다. 자동차 위주로 도시가 만들어지는 요즘 사람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길이 흔치는 않다. 청홍동은 그런 흔치 않은 동네 가운데 하나다. 길엔 꽃이 많다. 

다시 정릉천으로 돌아왔다. 몇 분 동안 자전거를 탔을까. 자동차가 많아지고 주위는 시끄러워진다. 아파트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물은 사라지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차도뿐이다. 여기서 건널목을 건너 정릉을 찾아간다. 골목길을 한창 거슬러 올라가면 정릉이 나온다. 

사진 / 김대홍 기자
보물 838호로 지정된 수표.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진 / 김대홍 기자

정릉은 조선 최초 공식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 묘다. 이방원 형제를 낳은 신의왕후는 결국 왕비로 책봉되지 못한 채 신덕왕후보다 5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무척 사랑했다.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을 왕세자로 앉힌 것도 그래서다. 태조가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들이 이에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이치.

태조의 지나친 사랑은 복수로 이어졌다. 뒤를 이어 왕이 된 태종은 정릉을 눈에 띄게 홀대했다. 능 앞까지 집을 지을 수 있게 허가했고, 태조가 죽은 이듬해 서울 도성 안 북원(지금의 정동)에 있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겼다. 더불어 강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능은 묘로 격하시켰다. 병풍석 등 석물은 청계천 광통교 복원공사에 썼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270여 년이 흐른 현종 10년(1669년) 송시열과 사림 세력에 의해 신덕왕후는 복위되고 묘는 능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찾아간 날은 월요일이었다. 월요일은 정기 휴일. 두 번 다 그랬다. 결국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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