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감성 겨울 여행] 강원 고성 초도항 황금물결 찰랑대는 한적한 손바닥 포구
[감성 겨울 여행] 강원 고성 초도항 황금물결 찰랑대는 한적한 손바닥 포구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11.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아늑한 손바닥 포구인 초도항 전경.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고성] ‘호랑이 등뼈’로 불리는 동해안 7번 국도는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항상 한가하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고 달리면 어느새 가장 북쪽의 작은 포구에 닿게 된다. 길이나 목적지나 한적하기는 매한가지. 초도항은 겨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포구다.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거칠게 몸부림 치는 동해 바다는 초도항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나 차를 세우게 만들었다. 그 냉정하고 차가운 풍경을 앞에 두고 일상에서 묵혀두었던 수십 가지 고민거리들을 야금야금 꺼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게 바다에 빠뜨리고 싶었다. 

초도항은 아래로는 화진포가, 그 위로는 대진항이 있어 이곳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조차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포구이다. 하지만 이곳을 한 번 찾은 사람들로부터는 ‘동해안 최고의 미항’으로 손꼽을 만큼 소박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울바람을 맞으며 그물을 손질하는 초도항의 어부들. 사진 / 손수원 기자

마을의 마스코트인 성게 동상이 있는 입구로 들어서면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여느 포구에서는 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한눈에 꽉 찬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로 작은 포구, 그 속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입구 쪽에 있는 동상으로 향한다. 해녀다. 둥근 테왁(물에 뜨기 위한 도구)과 망사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늠름한’ 젊은 해녀 동상이다. 동상 아래엔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라는 노래 가사를 적은 동판과 작은 버튼이 하나 있다. 누르면 노래가 나온다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른다. 

“황금물결 차~알랑대는 저~엉다운 바닷가아~.” 
스피커 성능이 어찌나 좋은지 순식간에 쩌렁쩌렁 노랫 소리가 포구 안을 뒤덮는다. 단숨에 그물을 손질하던 네다섯의 마을 주민과 낚시를 즐기던 세 명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된다. 아, 이렇게 민망할 수가! 이쯤 되면 노래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노래야, 어서 빨리 끝나라’고 되뇌며 ‘내가 한 짓이 아닌 척’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데, 아뿔싸 2절 시작. 게다가 노래는 어찌나 경쾌한지 고요한 포구에 노래만 신났다. 그렇게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초도항 입구 표지석. 사진 / 손수원 기자
사진 / 손수원 기자
양미리를 손질하는 어민들. 사진 / 손수원 기자

겨우 노래가 끝나자, 그때서야 노래 가사가 제대로 들어온다. 
황금물결 찰랑대는 정다운 바닷가 / 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아 / 중략 / 조개껍질 주워 모아 마음을 수놓고 영원토록 변치 말자 맹세한 사랑 /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 생략  
화진포에서 만난 연인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가사지만 ‘라라라라~’ 부분에서 방금 전의 민망한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른다.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방파제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미항’이라 알려진 만큼 방파제에서도 아기자기함이 묻어난다. 회색 시멘트에 파란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온갖 예쁜 그림들을 그려놓으니 야외 미술관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네 명의 해녀 얼굴 그림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검게 그을리고, 세찬 동해의 파도만큼이나 깊게 파인 주름이 거짓 없이 드러난 얼굴이건만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의 그것처럼 참 아름답다. 

방파제 곳곳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띈다. 월척은 아니지만 매운탕 거리는 됨직한 물고기들이 바구니 속에 가득하다. 

사진 / 손수원 기자
방파제에 그려진 아기자기한 그림들. 사진 / 손수원 기자

“바다낚시야 어느 곳에서나 낚싯대만 드리우면 되는 거지만, 초도항은 물고기도 잘 잡히고, 한적하고 경치도 좋고…. 게다가 앞에 광개토대왕릉이 있으니 월척도 많을 것 같고….”
강릉에서 온 박정식 씨는 자기 집에서도 바다가 지척이지만 낚시를 하려고 굳이 이곳을 찾는단다. 그러고 보니 저 앞의 섬은 다름 아닌 금구도다. 

“초도항 사람들은 금구도의 거북이 머리가 바다를 향해 있어서 마을이 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요즘에는 저게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 하니 진짜든 아니든 마을 사람들한테는 보물 아니겠어요?”

금구도와 광개토대왕릉이 엮이면서 초도항에 사람의 왕래가 잦아진 게 사실이다. 초도항이 ‘미항’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도 그와 때를 같이한다. 누가 봐도 금구도는 초도항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초도항 주민들도 여느 바다사람들처럼 배를 탄다. 10월부터 12월까지는 양미리가 제철이고 1월부터는 명태가 제철이라 농사로 치면 요즘이 농번기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바다로 나가니 초도항의 겨울이 특히나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2층 건물로 지은 횟집도 휴업 중이다. 성수기도 지난 요즘, 횟집을 열고 있는 것보단 바다로 나가 양미리를 잡는 게 더 이익일 게다. 

사진 / 손수원 기자
해녀동상. 사진 / 손수원 기자
사진 / 손수원 기자
초도항과 가장 가까운 금구도. 사진 / 손수원 기자

잡아 온 양미리는 인근의 거진항과 대진항에서 위판이 이루어진다. 때문에 초도항에는 그 흔한 어시장의 풍경도 없다. 부지런히 그물을 손질하고 배를 돌보는 어민들의 모습은 든든해 보이면서도 안쓰럽다. 

어떤 아주머니는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냐’는 물음에 목이 부어서 말이 안 나온다며 그물을 손질하다 말고 종이를 가져와 ‘양미리 잡으러 바다에’라고 적어주었다. 지난밤 찬 바람을 맞으며 그물을 손질하느라 몸살이 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또 나와 그물을 손질하고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찡하다. 

갈매기도 날개를 쉬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른한 오후, 해녀 동상에서 “황금물결 차~알랑대는 저~엉다운 바닷가아~”가 또다시 울려 퍼진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 연인들 덕분에 초도항의 적막이 유쾌하게 깨져버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