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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특집 ①]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의 봄, 가시리 마을을 가다
[특집 ①]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의 봄, 가시리 마을을 가다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3.03.13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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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유채꽃과 벚꽃이 활짝 핀 제주의 봄.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제주] 길섶에 핀 들꽃만 봐도 마음이 설레는 계절. 제주에도 봄이 찾아왔다. 뭉게구름이 이는 파란 하늘과 바다, 살랑대는 바람결에 속살처럼 보드라운 봄이 깃들어 있다. 뭐니 해도 섬을  휘감아 흐르는 샛노란 물결을 빼놓을 수 없다. 유채꽃과 말테우리의 고장인 가시리 마을에서 따사로운 제주의 봄을 만났다. 

녹산로에 핀 유채꽃과 벚꽃.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요즘은 전국에 유채꽃밭이 조성되어 조금 식상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제주의 봄에서 이 꽃을 빼놓으면 왠지 허전한 느낌이다. 팥소 없는 찐빵 같다고나 할까. 속된 말로 뻔하지만, 그럼에도 설레는 건 유채의 꽃말이 ‘쾌활’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맘때면 섬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봄의 향연에 제대로 빠지려면 가시리 마을로 가야 한다. 제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꽃밭이 기다리고 있다. 

녹산로에서 시작되는 봄마중
가시리의 봄은 녹산로에서 시작된다. 조천읍 교래리와 표선면 가시리를 잇는 제주를 대표하는 꽃길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된 멋진 드라이브 길이다. 봄엔 유채가,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여행자들을 부른다. 두 개 마을을 가로질러 난 도로가 약 10km에 걸쳐 있는데 교래리에서 출발하면 얼마 가지 않아 ‘가시리’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유채길. 사진
가도가도 끝이 없는 유채길.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정석항공관을 지나 길 중반을 넘어갈 즈음에 오른쪽으로 유채꽃 광장과 가시리 풍력발전단지가 펼쳐진다. 유채꽃 광장은 제주의 봄날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매년 4월이면 제주유채꽃축제가 개최되지만 코로나 시기에는 여행자들을 맞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갈아엎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축제는 다시 열리고 있다. 하지만 호젓한 봄나들이를 꿈꾼다면 주말이나 축제 시기는 피하는 것이 좋다. 운이 좋으면 꽃밭을 통째로 전세 낸 듯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4월 초에는 유채꽃과 벚꽃이 함께 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넓은 꽃밭은 햇살이 내리쬐면 황금빛 바다를 이룬다. 바람이 쏴아 하고 불어오면 샛노란 파도가 밀려오고, 그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엔 희뿌연 물거품 대신 유채꽃 무리가 춤을 춰댄다. 세상에 모든 노란색이 여기 모여 있는 건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노랗게 물들어간다. 꽃밭에 몸을 던지기 전,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두루 눈에 담아 보자. 눈앞은 꽃 천지요, 멀리 한라산과 올록볼록한 오름들이 에워싸듯이 서 있으니 천상의 화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듬성듬성 놓인 풍력발전기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경에 한 점 포인트가 되어준다. 거대한 바람개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봄 향기를 퍼뜨리고, 여러 갈래로 나뉜 꽃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줬으면. 꽃에 파묻혀 있으면 한없이 봄에만 머물러 있고 싶어 진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온통 노란빛 세상인 가시리 유채꽃밭.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유채꽃밭 옆, 조랑말체험공원
유채꽃이 제주를 대표하는 봄의 전령사가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유채는 기름을 짜내는 유료(釉料) 작물로 제주도에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빈 들녘마다 유채를 가득 심어 놓았으니 봄만 되면 섬 전체가 노랗게 뒤덮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제주의 봄은 유채꽃이란 등식이 성립되지 않았을까 싶다. 농산물 개방화 이후에는 작물 재배가 줄어들면서 관광객들을 위한 관상용 꽃밭들이 많아졌는데 유채꽃 광장도 이런 목적에서 조성되었다. 사실 유채꽃을 심기 전에는 수풀이 무성한 벌판이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말이 뛰어다니던 초원과 조우하게 된다. 

큰사슴이오름에서 바라본 너른 초지와 따라비오름. 일부 구간에 풍력발전기와 태양광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지금은 유채꽃 명소로 이름나 있지만 가시리는 오랜 시간 제주 목축 문화를 발전시켜 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가장 큰 국영 목장이 운영되었으며 옛 흔적이 지금 마을공동목장 형태로 남아 있다. 약 600년에 걸쳐 내려온 섬의 목축 역사와 말테우리의 이야기는 유채꽃 광장과 이웃한 조랑말체험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마을에서 공동 운영하는 조랑말체험공원은 조랑말 박물관과 승마장, 카페가 모여 있는 문화공간으로 가볍게 나선 봄나들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유채꽃밭 바로 옆 조랑말체험공원에 있는 승마장. 옛적 갑마장이 조성되었던 장소이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조랑말체험공원에 설치된 조형물.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INFO 조랑말체험공원(유채꽃 광장)

주소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녹산로 381-15
문의 064-787-0960

제주 목축 문화를 이끌어온 마을 
국내 최초의 리립(里立) 박물관인 조랑말박물관은 가시리 주민들이 한데 뜻을 모아 건립한  마을의 자랑거리다. 아담한 규모에 제주 목축 문화의 변천사와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말 뼈 등을 봤을 때 제주에서는 이미 선사 시대부터 말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기후가 따뜻하고 초원이 넓은 데다 맹수가 없어 고려 말에 몽골인들이 대규모 말 사육장을 설치했는데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영 목장인 산마장 체제가 확립되었다. 

제주 목축 문화의 변천사와 유물을 전시한 조랑말박물관.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조랑말박물관 내부 전경.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제마와 제주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볼 수 있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말에게 물렸던 재갈과 동자.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말테우리가 입었던 우장과 농사 기구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가시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녹산장이 있던 곳이다. 무려 6개의 오름을 잇는 넓이였다고 하니 목장 규모가 대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최고 등급의 말을 길러내는 갑마장도 녹산장 안에 있었다고 한다. 진상마는 물론 전마(戰馬)나 파발마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말을 키워내던 곳이었으니 제주 목축 역사의 한 축을 가시리가 담당해 온 셈이다.  

가시리 마을의 목축 문화를 보여주는 조형물.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박물관에는 말테우리의 고단한 삶도 녹아 있다. 테우리는 제주에선 마소를 키우는 목자(牧子)를 일컫는데 특히 말을 치는 이들을 말테우리라 불렀다. 목동이라고 하면 왠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드넓은 초원을 옮겨 다니며 말 떼들을 관리하는 일이 어디 쉬웠을까. 밭에 몰아 넣은 말들의 분뇨를 받아 ‘바령팟’을 만들고, 씨 뿌린 밭이 잘 다져지도록 말들을 질서 정연하게 다뤄야 하며, 도망친 말을 찾아 사방팔방 헤매 다녀야 하는 것도 모두 말테우리의 몫이었다. 가시리에는 말테우리들이 쉬어가던 목감막과 테우리막이 아직 남아 있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말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도망친 말을 찾아 사방팔방 헤매 다녀야 하는 것도 
모두 말테우리의 몫이었다.

말의 고장에 왔으니 봄바람을 맞으며 승마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박물관에서 지척인 거리에 승마장이 있다. 옛적 갑마장이 있던 초원을 말을 타고 활보하는 코스는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체험할 수 있다. 말발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흙덩이들이 풀썩거리며 풋풋한 봄내음을 풍긴다. 

큰사슴이와 따라비오름에 오르면 옛 녹산장의 역사가 보인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봄빛이 깃든 갑마장길 걸어볼까
마소를 방목하며 살아온 삶의 터전을 따라가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 갑마장길은 가시리 방문자센터에서 출발해 오름들을 오르내리고 들판을 가로질러가며 수백 년간 자연에 순응해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을 쫓아간다. 갑마장길은 전체 거리가 20km나 되기 때문에 완주하는데 꼬박 한나절은 걸린다. 거리가 부담스럽다면 조랑말체험공원 길 건너편부터 시작하는 쫄븐(짧은) 갑마장길을 추천한다. 따라비와 큰사슴이오름을 거쳐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형 코스로 10km 남짓한 거리에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들판과 오름을 넘나드는 갑마장길을 따라 걸어보자.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갑마장길 안에 산마장 둘레에 쌓았던 잣성이 잘 남아 있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갑마장길에는 숲과 초원, 오름을 종횡무진하고 다녔을 말테우리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가시천에 움푹 파인 물웅덩이에선 목을 축이는 말들의 모습이 비치고, 목초 지대를 지나갈 때는 광활한 평원을 호령하던 말테우리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조선 시대에 쌓았던 잣성도 볼 수 있다. 잣성은 산마장 둘레와 목장 간의 경계에 쌓았던 돌담으로 가시리 마을에는 축조할 당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많다. 오름에 오르면 그 옛적 드넓었던 목장을 상상하게 된다. 태양광과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선 지금의 풍경은 오래전 모습과 많이 다를 것이다. 이른 봄 들불을 놓던 일이나 너른 초지를 달리던 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지만, 가시리 마을의 봄은 여전히 찬란하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유채꽃이 있기에.  

여행 TIP

녹산로의 유채꽃은 3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며 보통 4월 중순까지 만개한다. 정석항공관부터 가시리 마을 안길 구간에는 벚나무가 줄지어 있어 때를 잘 맞추면 유채꽃과 벚꽃이 만발한 진풍경도 만날 수 있다. 벚꽃은 3월 말~4월 초 사이 개화하는데 날씨가 좋지 않으면 금세 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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