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양구] 대한민국의 곳곳을 돌며 그 속에 숨겨진 자연미와 예술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이 끝나면 낯설었던 미학이 삶의 곳곳에 흔적과 통찰로 스며들 것을 기대한다. 미술교육학박사인 정수기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네 번째 미학여행. ‘K-감성’ 가득한 양구로 나들이를 나섰다.
강원도 북부의 양구를 들어서면 산과 늪지, 강이 잘 어우러진 자연환경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양구는 백자의 재료인 좋은 백토가 나는 곳으로 화가 박수근의 고향이다. 아울러 현대 한국미술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도자기와 유화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지역이다. ‘양구 미학여행’은 양구의 미적 매력을 탐구하는 여정으로 양구백자박물관, 한반도섬, 그리고 박수근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술작품과 자연환경을 함께 돌아보았다.
양구백자박물관: 도자기의 미학적 탐구
양구백토로 빚은 천 개의 도자기에 담긴 미적 공감
양구백자박물관은 천 개가 넘는 도자기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양구 지역의 토양에서 나온 백토로 만들어졌다. 백토는 세월이 빚은 자연 재료로 다양한 질감과 모양을 담고 있다. 백토로 만든 도자기는 자연의 형태와 울림을 담아내며 선명한 선과 조형적인 면을 형성한다. 특히, 양구의 토양은 고유한 미적 감각을 지니고 있어, 이를 이용한 도자기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에 안성맞춤이다.
양구백자박물관의 도자기 작품들은 제작자의 창의성과 예술 표현력을 반영하면서 조형적 원리와도 조화를 이루는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작품의 이름은 종종 그 형태나 색감, 담고 있는 의미와 연관된다. 이러한 규칙은 작품의 미적 특성을 강조하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전달한다.
도자기는 ‘종류→안료→문양→용도’ 순서라는 규칙에 따라 다소 긴이름이 붙여져 그 이름만으로도 도자기의 형태와 그림, 쓰임새까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다. 종류는 백자인지 청자인지 분류한다. 안료는 철화, 청화, 구리(동화 또는 진사) 등이다. 문양은 운룡문(구름과 용), 운학문(구름과 학) 등이다. 용도나 형태는 호(항아리), 매병, 편병, 주자(주전자) 등으로 쓴다. <백자청화운룡문호>로 불리는 용이 그려진 의례용 청화백자는 백자에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구름 속을 나는 용을 그린 항아리라는 뜻이다.
일반 백자ㆍ궁중 백자ㆍ북한 백자, 다양한 스타일의 탐구
2006년 6월 방산자기박물관으로 문을 연 양구백자박물관은 오픈형 수장고에 다양한 종류의 백자를 소장하고 있다. 600년에 걸친 백자생산의 역사를 소개하며 조선백자의 마지막 꽃이라고 불리는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일반 백자, 궁중 백자, 북한 백자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양구 백토가 빚어낸 고고한 조선백자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궁중 백자는 우아하고 섬세한 선과 면을 통해 고급스러운 미를 표현하며, 일반 백자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전달한다. 이들 다양한 스타일을 통해 양구백자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한국 도자기 예술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양구 9경 중 5경에 선정된 양구백자박물관은 다양한 도자기뿐 아니라 202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도자역사문화실 등 수려한 건물도 눈길을 끈다. 그리고 그 건물 하나하나에는 예쁜 조형물이 숨어있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박수근미술관: 거친 질감과 꾹꾹 눌러 담은 절제된 색감
박수근 파빌리온, 박수근의 작품 속 집이 건축이 되다
박수근미술관의 중심에는 박수근 파빌리온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박수근 아뜰리에를 재현해놓았으며 외벽은 가설건물처럼 촘촘한 금속 비계를 덧대어 놓은 듯하다. 그래서 해가 진 이후 조명이 켜지면 거친 질감으로 색감이 덧칠해진 듯 묘한 요철 질감이 느껴진다. 이는 박수근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마티에르(질감)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것이다. 혹시 이런 느낌까지 보고 싶은 관람객이라면 해가 진 이후에도 바라보길 권한다.
전시 공간의 내부는 사선의 비탈길을 오르는 듯 능선처럼 설계되었다. 관람자의 동선은 건물의 내부에서 외부, 박수근 묘역이 보이는 곳까지 돌아가며 비교적 길게 이어진다. 마치 박수근 작품 속에 관람객이 들어간 듯한 체험을 하게 해준다. 박수근 파빌리온은 건물의 설계부터 미적 요소와 예술적 표현력을 고루 갖춘 공간이다. 낮에는 박수근 그림의 형태를 즐길 수 있고, 저녁에는 색감과 질감을 느낄 수 있어 현대건축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예술의 보고서를 담은 실감 수장고, 라카디움
박수근미술관은 특별한 공간인 라카디움을 보유하고 있다. 라카디움은 라이브러리와 아카이브의 합성어이다. 박수근의 작품은 유족보다는 다양한 수집가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어 박수근미술관에 원작이 모두 있지 않다. 그래서 실감 영상을 통해 다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라카디움은 공간감과 원근감을 고려하여 디자인되었으며, 관람객에게 실감 나는 예술의 세계를 제공한다. 작품의 세부 사항과 예술가의 작업 과정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여주거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이 레이어 되어 벽면을 가득 채운다. 라카디움은 화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보고서 역할을 하며, 관람객에게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체험케 한다.
박수근미술관은 꼬물꼬물 아뜰리에(유아 대상)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해 학교로 찾아가는 프로그램도 있으므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박수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작품과 깊은 소통을 도모한다. 예술가와의 대화, 작품에 대한 해설, 그리고 창작 활동 등을 통해 관람객은 예술의 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은 예술과 대중 간의 소통과 이해를 높여 박수근미술관을 한국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어 간다.
한반도섬: 예술적인 자연의 풍경
블랙 스크래치보드 위 색채의 예술, 한반도섬 야경
파로호 상류에 자리한 한반도섬은 버려졌던 습지를 활용하여 국민관광지로 거듭난 곳이다. 호수 한가운데에 한반도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공 섬으로, 섬까지 이어지는 나무 데크길이 있다. 강변 바람을 맞으며 섬을 둘러 만들어진 산책길에서 돌하르방, 지리산 등 한반도의 곳곳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조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한반도섬의 백미는 야경을 꼽을 수 있다. 학교 미술 시간에 먼셀의 색상환표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반도섬의 야경은 마치 색상환표의 여러 색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한반도섬으로 향하는 입구부터 데크를 따라 조명이 켜진다. 색이 변하는 조명은 조형물을 비춰 다채로운 색채로 빛나게 한다. 조명으로 만든 벤치는 다양한 느낌으로 빛나며 요정 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조명은 밤의 숲길과 호수를 아름답게 비추며 자연과 어우러진다.
양구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해 ‘한반도의 배꼽’으로 불리기도 한다. 매년 열리는 양구 배꼽축제 때 한반도섬에서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다. 한반도섬의 다채로운 야경과 검은 하늘 위에 펼쳐지는 불꽃쇼는 마치 블랙 스크래치보드를 긁어내는 듯한 황홀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최근 양구군은 한반도섬 야경을 국민관광콘텐츠로 다듬는 중으로 밤 여행 코스로 들러 추억이 될 인생 샷에 도전해보기 바란다.
정수기 미술교육학 박사
27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아이들의 취향을 존중하는 남다른 학급 운영으로 유명했던 정수기 선생님. 여행 좋아하는 정 선생님은 아름다운 우리 여행지를 다니며 미학탐구를 통해 여행도 미술교육의 현장이라는 걸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