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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나’를 찾기 위해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정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나’를 찾기 위해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정
  • 신정일 객원기자
  • 승인 2018.05.2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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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서 명호면 명호 소재지까지
분천에서 출발하는 길. 낙동강에 봄빛이 담겼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봉화] 나라 안의 강을 걷는 길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길이 어디일까? 남한의 5대 강을 다 걸어본 사람으로서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곳이 봉화군 석포면에서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까지 가는 길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고 노래한 김수영 시인의 시 <아픈 몸이> 한 소절을 되뇌며 여장을 꾸린다.

광복 이후 우리 힘으로 처음 만든 철길을 지나
아침 햇살이 찬연히 빛나고 있는 분천역을 뒤로 두고 길을 나선다. 봄의 낙동강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철길 옆으로 난 길은 풍애마을로 향한다. 풍애나루 건너 물돌이동에선 겨우내 묵은 밭을 갈무리하는 손길이 부산하고, 철로 옆 산비탈에는 봄에 물드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강물을 따라 길을 잇다보면 역무원도 없고, 승객의 발길도 끊어진 현동역에 이른다. 봉화에 철길이 놓이기 시작한 것은 1944년이었다. 납과 아연 그리고 백중석이 나오는 이곳에 영주에서 춘양까지 연결되는 철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풍애나루 부근을 흐르는 낙동강 물.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봄바람과 구름과 적막이 오가는 현동역.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일제가 경상북도 북부지방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철길을 놓기 시작했는데, 그 이듬해에 봉화까지 철길이 열렸다. 해방이 된 후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49년에 다시 춘양까지 잇는 공사를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중단되고 만다. 두 번씩이나 철길공사가 중단되자 봉화지방에서는 “억지로 춘양까지 철길을 놓으려고 들면 변란이 일어난다”라고 하여 ‘억지 춘양’이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에 춘양을 거쳐 삼척 탄전지대까지 잇는 공사가 벌어져 2년 만에 완공되었다. 영주에서 철암까지 이어져 영암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이 철길은 해방된 뒤에 우리의 기술로 가장 처음 놓은 철길이다.

현동역에서 막지고개를 넘어 현동으로 간다.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봉화까지 오는 열두 고개 중에 마지막 고개라서 막지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동교 아래로 강물은 여울져 흐르고 낙동강 쉼터에 여장을 내려놓으며 바라본 도로 표지판에 ‘울진 57km’라고 쓰여 있다.

모든 나무의 으뜸으로 쳤던 춘양목
봉화군은 예로부터 춘양목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춘양면에서 나거나 다른 곳에서 모여든 소나무 재목을 ‘춘양목’이라 불렀는데, 한옥을 짓는 데에 으뜸가는 목재로 쳤다. 봉화읍의 청암정과 석천정 같은 조선 중기의 건물들이 춘양목으로 지어졌고, 안동, 예천, 의성 지방의 세도가나 서울의 반듯한 양반집들도 대부분 춘양목으로 지었다고 한다.

춘양목은 겉껍질에 붉은빛이 돌아 적송이라고도 부르는 육송이다. 다른 지역의 육송과는 달리 곧게 자라는데다 껍질이 얇고 나뭇결은 부드럽다. 자른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으며, 그냥 하얗게 보이기 쉬운 다른 육송과는 달리 붉은빛 또는 보랏빛을 띠었다고 한다.

춘양목은 춘양면의 북쪽인 소천면과 강원도 지역에까지 분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제 말기부터 춘양에 수십 개에 이르는 제재소가 들어서며 마구잡이로 베어내기 시작해 지금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춘양목이 남아있다.

임기리를 걸으며 지나게 되는 임기 소수력발전소.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혀 걷는 사이에 여정은 임기리에 접어든다. 원래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기에 숲터, 수터 또는 임기리(林基里)라고 부른 임기리 감전마을에는 메밀꽃들이 눈부시게 피어있다. 메밀밭 아래에서 낙동강은 누구의 범접도 허락하지 않을 듯한 기세로 흐르고 있고 조금만 더 가면 갓바위에 다다른다. 갓처럼 생긴 갓바위가 있는 낙동강가에는 깊디깊은 갓바우 소가 있다.

갓바위 다리를 지나자 음내마을에 이른다. 낙동강가에서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조차 음내인데 햇살이 가득 퍼진 탓인지 음내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임기분교를 지나면 영양, 봉화로 갈라지는 31번 국도가 지척이다. 임기교를 지나자 담월마을이고 조금 더 걸어가자 길 아래에 푸른 호수 같은 임기 소수력발전소가 보인다. 강 건너 법전면 눌산리 물알로 건너가는 나루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물알(수하동)마을도 어딘지 알 길이 없다.

처음 낙동강을 걸었을 당시에는 소수력발전소 직원들에게 점심을 얻어먹고 강을 건넜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문조차 잠겨 있고, 비가 내린 뒤라서 물살이 더 없이 드세다. 잘 건너갈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이 여러 갈래라 중구만방이다. 물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돌아서 가고, 이 물을 못 건너랴 하는 사람들은 강물에 들어선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하리

신대철 시인의 <강물이 될 때까지>라는 시 한편을 읊조리며 마음을 다진 후 천천히 건넌다. “천하를 편력하려거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마다하지 마라.” 옛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한 발 한 발 걸어가자 건널 만하다. ‘지금 건너가는 낙동강의 물살을 얼마나 여러 번 건너야 낙동강 하구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많은 사람이 강 너머에 닿아있다.

임기 소수력발전소에서 강물을 건넌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강은 무사히 건넜으나 길은 이제부터가 문제다. 옛날에는 길이 없어서 힘겹게 걸었던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는 우려로만 끝나고 봉화군에서 길을 잘 만들어 놓았다.

아름마을을 지나며 고개마루에 접어들고 길은 사뭇 돌아간다. 까투리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가고 멀리 걸어가야 할 길이 굽이치듯 보인다. 강은 이곳에서 또 하나의 작은 지류 가천을 받아들인다. 삶 역시 그러하리라. 나이를 먹어갈수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하나하나의 지류일 것이다.

합강 나루엔 빈 배만 매어있고
멀리 강가에 배 한 척이 보이고 강 건너에 집과 전봇대가 보인다. 삼동리에서 고계리로 건너가는 합강나루터다.

강 이쪽과 저쪽에 나룻배 한 척씩이 매어있고 강 건너에서 재산천이 합해진다. 재산천은 재산면 동쪽의 봉화재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흐른다. 현동리에 이르러 북쪽으로 꺾이며 활 모양을 이루고 강산리 합강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이즈음부터 산길을 오른다. 바위 벼랑과 명호 소수력발전소가 있기 때문에 강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합강 부근에서 세차게 흘러가는 낙동강 모습.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고개를 넘어서고, 또 다시 두 고개를 넘어서야 고개 마루턱에 걸려있는 아랫 황새마을에 도착한다. 황새마을 쉼터 앞에는 나무 장승과 함께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운치 있게 서있다. 아랫 황새마을에서 삼동초교가 있는 황새마을까지도 한참을 걸어야 도착하고, 35번 국도를 따라 삼동1리까지 걸어간다. 삼동1리 마을의 논 가운데에는 돌장승 한 기가 서있고, 그곳에서 명호 소수력발전소로 가는 산길이 아름답다.

명호 소수력발전소에서 강물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강물소리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듯이 위풍당당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곳에서 멀리 명호 소재지가 보이며, 명호에서 낙동강은 춘양천을 받아들인다.

명호 소수력발전에서 낙동강 물은 위풍당당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낙동강이 하나하나의 지류를 받아들인 뒤 넓혀져 흐르듯이 사람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지식과 경험을 받아들여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길에서 길을 찾고 길에서 나를 찾는 나그네나, 그와 함께 길을 걷는 도반들 역시 보이지 않는 그 길, 즉 도(道)를 향해가는 나그네일 것이다.

“무릇 도란 진실로 있으면서도 하는 것도 없고 형체도 없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수는 있으나 손으로 주고받을 수는 없고, 마음으로 체득할 수는 있으나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장자가 ‘대종사’ 편에서 했던 말이다. 그 말이 내포하는 것과 같이 나 역시 어느 날 문득 그 길에서 ‘참 다운 나’를 발견하기 위해 이처럼 낙동강을 걷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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