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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사람은 바뀌었지만 강물은 여전히 흐른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사람은 바뀌었지만 강물은 여전히 흐른다
  • 신정일 객원기자
  • 승인 2018.05.1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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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경북 봉화군 석포역에서 승부역 지나 분천역까지
강원 태백을 지나 경북 봉화로 흘러가는 낙동강. 사람이 금을 그은 경계와 상관없이 강물은 흐른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봉화] 낙동강이 강원도 태백을 지나면 경상북도 봉화로 흘러들어간다. 이는 인간들의 편리에 따라 그어진 경계에 대한 얘기일 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인 강은 아무 말 없이 봉화군 석포면 육송정(六松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천천히 걸으라” 일러주는 바람 소리
육송정마을은 강가에 큰 소나무 여섯 그루가 있어서 이름 붙었는데, 낙동강은 이곳에서 송정리천을 받아들여 석포를 향해 흐른다. 돌이 많고 앞에 개가 있어서 석개 또는 석포라고 불리는 석포로 가는 길은 조용하여 걷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봉화군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석포면 소재지 길 아래로 1946년에 만들어진 석포역이 있다. 강 건너에는 연화광업소에서 운영하는 거대한 아연공장이 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구석지고 외진 석포에 비철금속 제련과 정밀화학 분야의 생산시설을 갖춘 공장을 준공했던 것은 1970년의 일. 이 지역에서 나는 고순도의 아연을 이용해 황산 카드뮴, 황산동, 황산망간 등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석포역 뒤편의 아연제련소가 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승부마을에서 승부역으로 건너가는 다리.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석포리에서 석포리천마저 받아들인 낙동강은 더욱 넓게 흐른다. 이제야 강이 강 같고 걷는 나도 나 같다고 느낀다. 강과 산과 사람이 강물을 따라 함께 흐르면서 어느새 승부리로 접어든다.

승부리(承富里)는 본래 안동군 소천면에 속했다. 승보 또는 승부라 하였는데, 고종 광무 10년(1906)에 봉화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승부리가 되었다.

인간의 역사는 발걸음의 역사고, 천천히 걸어야 사물이 내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가리라 마음을 먹지만, 마음은 항상 저절로 바쁘기 때문에 발걸음이 자꾸 빨라지는 게 문제다. 그런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린다. “천천히 삶을 즐겨라, 너무 빨리 달리면 경치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놓치게 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석포에서 승부 가는 길에 우연히 본 한반도 지도 형상. 자연이란 얼마나 신기한 것인가.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철길을 옆에 두고 아름답게 흐르는 강
영동선 열차가 철커덕 철커덕 강 건너로 지나가고 강 가운데에 세 개의 바위들이 의좋은 형제들처럼 앉아있는 결둔마을에 이른다.

결둔(結屯)마을은 마무이마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강원도 삼척에서 구리를 운반하던 말을 매어두었던 곳이라서 결둔이라 불렸다. 마무이마을은 구리를 싣고 결둔으로 들어오던 말이 산을 넘어서는 첫 입구라 해서 마무이(말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무이마을을 지나면 암기동마을에 이르고, 고개를 넘어서자 제법 큰 마을인 소재(소금현, 암기)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승부마을은 지척이다.

승부마을에는 “텃밭이 세 뼘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승부역이 있다. 겨울이면 눈꽃열차가 운행되는 역이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승부역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역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규모가 큰 기차역이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승부역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글귀가 적힌 비석.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옛날에는 철길을 제외하고는 낙동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강 옆으로 새로 만들어진 낙동강을 따라서 휘돌아가는 길을 걸을 수 있다.

강은 이곳에서 전인미답의 경치를 드러내며 흐르고, 그 소리는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다. 이곳 소천면 고선리ㆍ분천리ㆍ승부리에 걸쳐 있는 비룡산(飛龍山)은 높이 1120m로서 용이 나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낙동강은 이곳에서부터 너무도 아름답다.

사람이 사는 마을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영동선 철길 옆으로 난 아름다운 길이 이어지다가 야트막한 산을 넘는다. 그 길을 한참을 휘돌아가야 다시 영동선 철로를 만난다. 그곳에서 제법 오래 걸어야 양원역에 이른다.

양원역은 역사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다. 오직 슬레이트 건물에 ‘양원역 대합실’이라는 나무 팻말 하나만이 걸려있는 자그마한 간이역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지역 사람들이 탄원을 하여 만들어졌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폐쇄된 곳이다. 지금은 지역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음식과 지역상품을 팔고 있다. 20여 년의 세월 속에 이곳도 달라진 모습이다.

철길을 벗어나자 흐르는 강물 위로 다리가 놓여있고 벼랑 위에 그림처럼 드리워진 소나무 너머로 원곡동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회동천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다시 휘돌아가서 비봉 동쪽에 있는 녹문에 이르고, 밤나무가 많았다는 밤밭마을을 지난다. 앞산이 자(尺)처럼 생겼다는 척구마을 북쪽에 있는 비동마을 앞에서 비동2교를 만나 낙동강을 건넌다.

영동선 열차는 철커덕 철커덕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약 20년 세월 속에 변한 것들
다리를 지나 조금 언덕배기를 오르자 분천이다. 처음 낙동강을 걸었을 때에는 저문 밤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햇살이 찬연한 시간이다.

낙동강이 마을 중앙으로 흐른다고 하여, 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분천역이 있다. 예전에는 봉화 지역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벌이던 큰 장이 섰다는데, 지금은 흔적이 사라졌다. 양원역처럼 분천 지역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토산물과 음식들을 팔고 있다.

낙동강을 처음 걸었던 2001년 가을에는 늦은 시각에 분천에 도착한 뒤 소천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동해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다. ‘나그네가 묵어가는 곳’인 여인숙 요금이 그 당시 하룻밤 만원이었다. 요즘 성업 중인 게스트하우스보다 훨씬 싼 요금을 주고 ‘등을 지져야 하니 불을 꼭 넣어 달라’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너무 많이 걸어서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파서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기억 속 여인숙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없다.

옛날에는 큰 장이 섰던 분천역. 지금은 산타빌리지라는 명칭의 마을로 변모했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사라지는 것이 어디 여인숙뿐이랴, 그 때 만났던 사람들도, 그 때 나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들도 세월 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곳 분천에 부내나루라고 하는 낙동강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나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분천1교가 들어서 있고, 그 아래로 낙동강은 유장하게 흐른다.

많이도 걸었다. 거의 8~90리(약 35km)를 걸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서 어디까지가 내 몸인지 모르겠다. ‘자고 나면 풀리겠지’하면서 바라 본 낙동강은 어둠 속에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마음도 역시 어둠 속에 서서히 침잠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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