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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 인물 기행] 영월에 누워 있는 나그네 김삿갓
[역사 인물 기행] 영월에 누워 있는 나그네 김삿갓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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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김삿갓 묘역 앞으로 흐르느 개울. 평생을 떠돌던 그의 넋을 싣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2003년 7월. 시진 / 영월군청 제공
김삿갓 묘역 앞으로 흐르느 개울. 평생을 떠돌던 그의 넋을 싣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2003년 7월. 시진 / 영월군청 제공

[여행스케치=영월]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건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간 사람이건. 역사 인물기행 첫회로 영원한 나그네 김삿갓(김병연)을 찾아갔다.

느닷없이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창 밖의 하늘이 너무 맑아서, 혹은 햇살이, 바람이 너무 좋아서, 때로는 이곳만 아니라면 하는 마음으로…. 떠나고 싶은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불쑥 마음이 가는 대로 누구나 떠나지는 못한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 끝에는 항상 일상의 틀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일상의 것들을 늘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결국 그 일상에 붙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늘 느닷없이 떠나는 것에 대한, 떠도는 삶에 대한 알 수 없는 동경과 매혹을 느낀다.

이백 년 전쯤 평생을 그렇게 세상을 떠돌았던 김삿갓은 행복했을까? 우리가 꿈꾸는, 떠나는 자의 삶을 산 그가 정말 행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평생 안주하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이 버거웠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묘가 있는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를 향해 떠나던 날, 아침 햇살이 유난히 맑았다. 여행을 망설이던 나에게 별 것 아닌 일상의 아침이 결국 여행을 가야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1893년 김삿갓이 죽고, 영월읍내 유지였던 박영국에게 무덤이 발견된 1984년까지 김삿갓은 죽어서도 한 걸음쯤 세상 밖에 있었다.

지금이야 도로가 묘역까지 깔려 있어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영월읍에서 와석리는 70리 길로, 노루목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와석리까지 20리 산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와석리에 묻히게 된 것은 둘째 아들 익균의 효심 때문이었다.

영월군하동면 와석리 김삿갓의 묘. 전남 화순에 묻혀 있던 그를 둘째 아들 익균이 유언에 따라 이곳으로 이장했다. 2003년 7월. 사진 / 영월군청 제공
영월군하동면 와석리 김삿갓의 묘. 전남 화순에 묻혀 있던 그를 둘째 아들 익균이 유언에 따라 이곳으로 이장했다. 2003년 7월. 사진 / 영월군청 제공

익균은 그의 유언대로 전남 화순에 묻혀 있던 그를 와석리로 이장했다. 와석리는 김삿갓이 젊은 시절 살았던 곳이다.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은 시절은 있다. 그 시절이 지나갔을 수도, 지금일 수도,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김삿갓 또한 평생을 두고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때가 와석리 시절이었나 보다.

세상을 향해 나갈 목표가 있었고, 자신감이 있었던,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그곳에 묻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그 순간부터―폐족이라는 계급적 현실과 조부를 두 번 죽인 죄인이라는―그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버렸다.

선천 방어사였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투항했다고 사형을 당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김삿갓은 스무 살 되던 해 과거에서 조부를 규탄하는 글로 장원을 했는데 조부를 팔아 입신 양명하려했다는 죄책감에 글공부와 관직을 포기한다.

이후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을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김삿갓은 이를 포기한 채, 당시 봉건 질서 속에서 무너지며 고통받던 민중들 속을, 갓 대신 삿갓을 쓰고, 이름을 버리고 떠돌았다.

김삿갓 공원. 영월군에서는 매년 10월 김삿갓 문화큰잔치를 벌인다. 2003년 7월. 사진 / 영월군청 제공
묘역의 돌탑. 죽어서도 세상을 외면하고 와석리 산골에 묻혀있던 그. 그러나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2003년 7월. 사진 / 영월군청 제공
묘역의 돌탑. 죽어서도 세상을 외면하고 와석리 산골에 묻혀있던 그. 그러나 세상은 그를 잊지 않았따.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2003년 7월. 사진 / 영월군청 제공
김삿갓 공원. 영월군에서는 매년 10월 김삿갓 문화큰잔치를 벌인다. 2003년 7월. 사진 / 영월군청 제공

어쩌면 그는 스스로 세상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는 평생을 안주하지 않고 방랑하며 그걸 무기 삼아 자신의 시대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았다. 만약 그가 단순히 조부를 두 번 죽였다는 죄책감에 세상을 등진 사람이라면 아마 지금까지 기억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발에 비친 청산 그림자면 충분타” 김삿갓의 묘는 살아 생전 그의 모습 같았다. 세상을 등진 듯, 세상을 바라보는 듯 호젓한 모습이었다. 또 개발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산은 산이었고 묘역 앞에 흐르던 깊은 개울도 개울이었다. 산은 그늘을 만들어 세상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던 삿갓처럼 그의 묘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의 묘는 명절 때 보던 할아버지의 무덤처럼 소박했다. 애써 꾸미지 않은 듯, 돌의 생긴 모습 그대로 인 묘비는 봄 햇살에 그림자를 만들며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어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저절로 뜨고 저무는 햇살만으로도, 산이 내어주는 바람만으로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게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내게는 다소 낯설었지만 아름다운 건 분명했다.

소주 한 병 사서 주머니에 꽂고 다시 오고 싶었다. 오징어 한 마리 앞에 두고 김삿갓과 주거니 받거니 대작해도 좋을 듯 했다. 술안주가 없을 때도 사발에 비친 청산 그림자면 충분타 했다는 그의 일화를 생각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비록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도 한 번쯤 속말 털어놓으며 나 혼자 취해도 괜찮을 듯 했다.

스스로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지만 그래도 회한은 남은 듯, 그는 <난고 평생시>에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 갈래도 어렵지만 그만 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라고 노래했다.

평생을 자신의 현실과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남몰래 외로웠을 그. 나는 밤새 민박집 앞을 흘러가던 깊은 개울 물소리에 몸살을 앓다가 다시 세상의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느닷없이 떠나는 꿈을 꾸며.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떠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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