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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강화기행] 조선 무인의 기개가 서려 있는 '광성보'
[강화기행] 조선 무인의 기개가 서려 있는 '광성보'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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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광성보의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광성보의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강화] 백여 년 전 숱한 목숨이 산화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지금은 한가로운 가족공원이 됐다. 사람들은 그 날을 잊었어도 광성보 앞바다 손돌목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찌 네가 왔느냐. 빨리 돌아가 가솔을 돌보아라.” 형은 기가 막혔다. 바다에 진을 친 적함이 오늘 내일이면 밀고 들어올 판국인데 경기도 이천 그 먼 땅에서 동생이 죽자고 달려온 것이다.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30여 성상을 전장에서 또는 변방 객지에서 봉직을 해왔다. 5년 전 프랑스군이 쳐들어왔을 때 이 곳 광성진에서 적을 물리친 바 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무인의 본능으로 이 자리가 죽을 자리임을 안 그는 미련을 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동생이 찾아 온 것이다. 그 생명은 또 다르다. 꾸짖어 돌려보내려는데 동생은 동생대로 할 말이 있다. “나라가 위급하고 형님이 죽게 생겼는데 내가 어찌 돌아가겠소.” 동생은 죽음을 각오한 형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광성보 안은 가족공원. 하루 소풍을 즐기기에 알맞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광성보 안은 가족공원. 하루 소풍을 즐기기에 알맞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강화영 진무중군 어재연 장군과 백성 어재순 형제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코앞에 밀어닥친 적을 막는 게 우선 급했다. 미국은 1866년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가던 제너럴셔먼호가 군중에 의해 불탄 것을 빌미로 1871년 함대를 이끌고 강화로 쳐들어 왔다. 이른바 신미양요.

로저스 장군이 이끄는 미 함대는 기함 1척과 군함 4척, 1천1백 명의 병력으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무적함대였다. 미군이 최신식 함포와 야포로 무장한 반면 3백50여 조선군은 화승총 몇 자루와 홍이포 몇 문에 불과했다. 6월 10일. 저 밑 초지진에 요란한 포성이 울린다. 예나 지금이나 미군은 우선 포격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나중에 병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쓴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하루 종일 쏟아 붓는 포탄에 초지진은 초토화된다.

이어 11일 미군은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로 밀고 올라왔다. 어 장군은 1백 명을 뽑아 적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급습을 하려 했으나 죽음이 두려웠던 병졸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해상에서는 함포 사격을 하고, 지상에서는 야포로 공격을 하는 미 함대에 대응하는 조선의 화력은 미약하기만 했다.

어재연 장군 형제의 공덕을 기리는 쌍충비각과 전적비.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어재연 장군 형제의 공덕을 기리는 쌍충비각과 전적비.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드디어 적군이 진 내로 밀어닥치자 어 장군은 칼을 버리고 맨손으로 대포알을 던지며 적과 맞섰다. 병사들도 맨 손으로 치고, 쓰러지면 모래를 끼얹어 가며 싸웠다. 동생 어재순은 마음이 약해질까 포신에 몸을 묶고 싸웠다. 역부족이었다. 결국 형제와 병졸들 모두 전사하고 만다.

미 해군장교의 회고록에 의하면 “중상을 입은 20여명만이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었을 뿐, 끝까지 항거하고 힘에 부치면 포로가 될까봐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전했다. 그 수가 1백여 명에 이른다. 그래서인가 전투가 끝나고 사체를 수습하는데 모두 53구에 불과했다고 한다. 브레이크 중령은 “이렇게 좁은 지역에서 48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치열한 전투는 남북전쟁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다”고 썼다.

어쨌거나 조선군은 전멸한데 반해 미군은 사망 3명, 부상 7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군은 함대를 되돌려 철수하고 만다. 조선과의 전쟁이 녹녹하지 않음을 알고 되돌아간 것일까? 조선 조정도 숙연해졌다. 명장의 죽음에 대원군은 한마디 한다. “어 병사의 상구를 맞이하러 가지 않은 자들은 천주교인들일 것이다”.

바다로 길다랗게 뻗어내려간 용두돈대.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바다로 길다랗게 뻗어내려간 용두돈대.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이 때문인지 아니면 형제의 충절에 감복했는지 어 장군 형제의 상구를 맞는 기나긴 행렬이 도성을 메웠다. 신미양요는 이렇게 끝난다.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강화에는 평화가 깃들었지만 지금도 음력 4월 24일이면 어 장군 형제와 군졸들의 영령을 기리는 광성제가 열린다.

광성보에는 강화 53돈대 가운데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연이어 있다. 신미양요 당시의 극심한 포격에 돈대나 성문이 제대로 남아 있었을 리 없다. 성문 겪인 안해루는 광성돈대와 함께 1977년 복원된 것이다. 돈대와 돈대 사이는 가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옴푹 들어간 지형이 바닷바람을 막아 주어 아늑하게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바라본 바다는 아담하다.

강화해협중 가장 험하다는 손돌목.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강화해협중 가장 험하다는 손돌목.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그러나 속내를 알고 보면 강화 해협 중 가장 지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이 곳 손돌목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해 강화로 건너갈 때 배를 저은 이가 강화 어부 손돌이다. 왕이 가만 보니 손돌이 물살이 험한 쪽으로 배를 모는 게 아닌가. ‘이 놈이 짐을 해하려 하는구나’ 왕은 명을 내려 손돌의 목을 베라고 한다.

왕은 자기 목숨을 챙기려 하는데 어부 손돌은 남의 목숨을 챙긴다. “내가 죽고 위난에 처했을 때 이 바가지를 따라 배를 저으라”고 당부하고 칼을 맞는다. 왕의 배는 곧 가라앉을 듯 뱅뱅 도는데 한 사람이 손돌의 말이 떠올라 바가지를 띄었다. 그리곤 바가지가 가는 쪽으로 따라가니 무사히 강화도에 닿을 수 있었다.

신미순의총. 광성보전투에서 순국한 군사들을 한 무덤에 7~8구씩 안치했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신미순의총. 광성보전투에서 순국한 군사들을 한 무덤에 7~8구씩 안치했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그제야 왕은 후회를 하고는 손돌의 장례를 후하게 치른다. 신미양요라는 역사의 현장이기에 광성보에는 견학생들이 많이 몰린다. 그러나 한번 휘 둘러보고 지나서는 광성보의 매력을 알 길이 없다. 해송 밑에 돗자리 펼치고 바닷바람 쐬며 한담을 나누어 봐야 광성보의 운치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다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땅이니 예의는 좀 차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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