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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달의 사찰] 고려 공민왕이 나라의 안녕을 빌다, 영동 영국사
[이달의 사찰] 고려 공민왕이 나라의 안녕을 빌다, 영동 영국사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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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천태산에 자리한 영국사.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려 공민왕이 천일기도를 드렸던 영국사.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영동] 들어가다보니 자연 요새가 따로 없다. 영국사는 그 요새에 선임 지휘관이 있을 법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산 속에는 넓은 분지가 있고, 농사를 짓는 마을이 있다. 이런 지형에는 산성이 있는데, 영국사는 왜 이런 곳에 세워진 것일까?               

영국사는 일주문이 없다. 올라가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으나 좌우로 커다란 돌들이 많이 있다. 꼭 돌 뒤에 숨어서 누가 오는지 지켜볼 수 있게 길이 나 있는 것 같다. 올라가는 사람은 사방으로 노출된다. 유심히 살펴보면 길이 오묘하다. 절까지 1.2km, 40분 거리.

중간에 삼단폭포가 있다. 물이 말라서 폭포다운 품위를 잃고 실개천이 흐르듯 졸졸 흐른다. 폭포도 여름이 콧등 찡하게 그리울까! 추위가 찾아오자 금세 여름이 그립다. 30분쯤 오르니 매점이 나온다. 매점 옆 수많은 형형색색의 등산 표시 리본이 펄럭이는 길을 지나면 작은 계단식 논이 나온다.

많지는 않지만 산속에 논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휴농 상태. 잡풀이 우거졌다. 한동안 영국사가 TV에 출연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절이 아니라 입구에 일주문 대신 탁 버티고 서 있는 1천4백년 된 은행나무다.

1천4백년 된 은행나무, 여전히 젊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1천4백년 된 은행나무, 여전히 젊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은행나무 가지가 땅에 닿아서 뿌리를 내리고 새순이 돋았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은행나무 가지가 땅에 닿아서 뿌리를 내리고 새순이 돋았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기저기 뚫린 구멍을 콘크리트로 메우고도 은행을 주렁주렁 매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면 구린내 나는 은행을 툭툭 던진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1천4백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다. 본디 절을 짓고 난 후 나무를 심기 마련인데 이 절을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안내판에는 신라 문무왕 8년(668년)에 원각국사가 만월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써있지만 사실 원각국사는 고려 때 승려이므로 신라 땅에 와서 절을 창건했다는 설은 잘못 됐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천태종의 본사라는 주장이 있다.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유치원 꼬마들.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유치원 꼬마들.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중국 천태종의 본사가 ‘천태산 국청사’이기 때문에 나온 주장인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개조인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서 천태종을 배워와 이곳에 와서 절을 세웠다고 하는 설이다. 어쨌든 지금의 영국사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때 공민왕이 나라의 태평함과 편안함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드리고 나서 홍건적이 물러났다해서 영국사로 바꾸어 불렀단다.

은행나무는 영험한 나무다. 이 나무가 울면 나라에 난리가 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딱 다섯 번 울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6.25 한국전쟁, 5.16혁명,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할 때, 그리고 올 2월 10일 경에 크게 울었다고 한다. 세상사 늘 난리가 없는 날이 없는데 이보다 더 큰 난리가 또 있을까?

대웅전 안에 모셔진 지장보살.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대웅전 안에 모셔진 지장보살.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새로 지어진 루를 지나서 대웅전으로 갔다. 보통 대웅전은 대세지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을 차례로 모시는데, 영국사 대웅전은 대세지보살, 석가모니불,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은 극락전에 모시는 보살이다. ‘극락전에 있어야 할 지장보살이 대웅전에 있으니 분명 금당이 있을 것이다’라고 조심스레 추측한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대웅전 뒤 터를 1m도 파지 않았는데 지대석이 나왔다. 그래서 영국사는 지금 한창 발굴 중이다. 안양루 오른쪽으로 1백m 정도 가면 원각국사비가 있다. 심하게 훼손되어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다. 이수에는 ‘원각국사비명’이 양각되어 있다. 뒤에는 원당형부도와 석종형부도가 있다.

자연석 지대석이 큰 망답봉삼층석탑.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자연석 지대석이 큰 망답봉삼층석탑.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옆 오솔길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영국사 부도를 볼 수 있는데 높이 1.76m로 고려 때 세운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원각국사의 사리가 담긴 탑으로 추정하지만 사리는 발견되지는 않았다. 각 면마다 기왓골이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처마의 곡선과 전각이 어우러진 모양새가 경쾌하고 단아한 맛이 난다.

영국사부도, 각 면마다 기왓골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영국사부도, 각 면마다 기왓골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망탑봉은 은행나무를 지나 다시 매점이 있는 지점으로 가서 매점 정면에 있는 길로 올라간다. 소나무 사이를 걸어서 다리를 건너 산길을 5백m 정도 가다보면 고래를 닮은 바위가 운치 있게 산을 등지고 있다. 바로 옆에 망탑봉삼층석탑이 있는데 고려시대의 탑으로 높이가 3m다. 삼층석탑은 자연암반 기단 위에 세워졌다. 자연암반은 꼭 사람의 엉덩이처럼 생겼다. 탑 밑에 여인의 엉덩이라?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다. 탑은 신앙의 상징적 대상이다. 그러나 이 탑은 풍수적으로 볼 때 영국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 같다. 위치가 영국사에 이르는 골짜기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사 입구에 천태산을 다녀간 산악인들이 묶어 놓은 끈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영국사 입구에 천태산을 다녀간 산악인들이 묶어 놓은 끈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천태산은 능선을 넘으면 금산군 제원면은 옛 백제 땅이고 영국사로 올라가는 길의 영동군 양산면은 옛 신라 땅이다. 신라와 백제가 이 곳 들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1천4백년전 이 능선에 얼마나 긴장이 감돌았을지 짐작하고 남는다. 그래서 이 영국사는 승병이 있던 절, 호국불교 성격이 강하지 않았나 추측을 해보는데 사료가 거의 없어 자신하기가 어렵다.  

망탑봉에 앉아서 주차장 근처 누교리 마을을 내려다본다. 멀리 까맣게 움직임이 느껴진다. 앗!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망태봉에서 바라본 누교리.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망태봉에서 바라본 누교리.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Tip. 고형청 문화유산해설사가 들려주는 다리 이야기
망탑봉 가는 길에 작은 다리가 하나 있지요. 지금은 튼튼한 나무다리가 놓여있지만 예전에는 칡넝쿨로 엮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망탑봉에서 뵈는 마을이 ‘누교리’지요. 전에는 ‘지륵골’이라 했답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이 영국사에 천일기도를 드리려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공민왕의 왕후는 원나라 위왕 딸 노국대장공주였는데 일찍 죽었지요. 요승 신돈이 영국사에 같이 왔었는데 술을 함께 나누던 신돈은 공민왕을 위로 하면서 죽은 노국대장공주의 영혼을 신통함으로 불러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신돈은 그의 애첩을 왕비처럼 꾸며서 자정 때 쯤 왕의 처소로 보냈다는군요. 촛불의 불빛이 얼마나 은은했을지 몰라도 공민왕은 깜박 속아 넘어 갔답니다. 아니 그 여인이 진짜 왕비가 아니었을지라도 모르는 척 속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신돈의 애첩은 그렇게 낮에는 망탑봉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꽃처럼 단장하고 공민왕의 처소에 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밤길이 얼마나 위험했겠어요. 그래서 지륵골 사람들이 칡을 엮어서 다리를 놓아주었죠. 그 말을 들은 공민왕이 지륵골 사람들이 가륵해서 ‘누교리’라는 이름을 하사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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