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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산에서 만난 사람] 시각장애인 김미순씨 부부의 둘이자 하나인 산행
[산에서 만난 사람] 시각장애인 김미순씨 부부의 둘이자 하나인 산행
  • 이민학 기자
  • 승인 2005.06.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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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남편을 믿고 산을 오르는 김미순씨. 또 아내의 손을 한시도 놓지 않고 끌어주는 김효근씨.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보이지는 않아도 남편을 믿고 산을 오르는 김미순씨. 또 아내의 손을 한시도 놓지 않고 끌어주는 김효근씨.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부안] 아무리 부부라지만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을까? 아니 거꾸로 상대의 귀중한 생명을 맡아둘 수 있을까?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3년 전 아내가 시력을 잃었지만 남편이 손을 잡아가며 이산 저산 오르는 부부. 함께 산을 오르는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김효근, 김미순씨는 한달에 한번 혹은 두번 함께 산행을 하는 다정한 부부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아내 김미순씨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산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입부터 딱 벌어진다. "어떻게?" 두 눈 멀쩡한 사람도 하산 길에서 돌 한번 잘못 디뎌 엉덩이 깨지는 일이 어디 한 둘인가?

암벽에서 굴러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일도 허다한데. 앞 못 보는 아내가 남편 손잡고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고 지리산 능선을 타고 돌아다닌다고 하니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었다. 샌들로 갈아 신고 아내를 업어 건너는 과정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었다. 샌들로 갈아 신고 아내를 업어 건너는 과정이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샌들 신고 산을 오르는 남자
부부를 따라 전북 부안군의 내변산에 올랐다. 백두대간 호남정맥이 다하여 드넓은 호남평야를 이루는데, 그대로 서해로 들어가기가 아쉬웠는지 불쑥불쑥 다시 일어선 산들이 군(群)을 이루는 곳 변산반도. 바다를 끼고 도는 산군을 외변산, 남서부쪽 내륙 산악지를 내변산이라 하는데 울창한 수림과 계곡, 암벽 등이 절경을 이룬다.

산행코스는 가마소를 지나 세봉을 올라 관음봉, 재백이고개를 거쳐 봉래구곡을 따라 내려오는 4시간 남짓한 코스. 전북대연수원이 있는 평지를 가로질러 산 밑에 이르자마자 장애물에 부딪힌다. 간밤에 내린 비로 개울이 불어 수량이 만만치 않다.

남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등산화를 벗고 샌들로 갈아 신는다. 배낭을 돌려 앞으로 메고 아내를 업고 개울로 들어가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퍽이나 익숙하다. “왜 이리 무거워? 갈수록 무거워지네.” “다리 힘을 길러야 하니 그렇지. 그래야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잖아.” 남편의 농담에 아내가 받아친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려 준비 중이란다. 앞 못 보는 몸으로 등산에 마라톤까지? 도대체 이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힘들면 잠시 서서 숨을 돌릴 뿐 앉아서 쉬지 않는다. 행여 장애물이라도 만나면 남보다 두 배는 지체하기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힘들면 잠시 서서 숨을 돌릴 뿐 앉아서 쉬지 않는다. 행여 장애물이라도 만나면 남보다 두 배는 지체하기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17년 전 아이를 낳고나서 병을 얻었는데 3년 뒤에야 베체트병으로 밝혀졌지요. 1백 명 중에 2명이 걸릴까 말까 하는 희귀 난치병인데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다네요. 시력을 잃은 것도 그 때문이지요.”

베체트병은 서구보다는 동양 특히 동남아 지역에 환자가 많은 전신성 혈관염. 쉽게 말해서 신체 곳곳에서 염증이 발생하는 병이다. 후천적인 실명의 가장 흔한 원인이기도하다. 실명 외에도 근육통이나 관절염 등 증세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난치병. 머리 속에 염증이 생기면 정신분열증세까지 올 수도 있단다.

“2000년에 중국 남경의 중의대에 유능한 전문의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운동을 하라더군요. 한국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과 휴식을 취하라고만 했는데 정반대였죠.” 한창 시절인 이삼십 대를 온통 병마와 싸우며 별의 별 수를 다 썼다. 몇 년간 그 독하다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기도 했다.

마지막 약은 운동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헬스와 달리기. 한 2년을 하니 자신이 붙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10km와 하프 코스를 완주하였다. 이제 풀코스 도전을 하려한다. 마라톤을 하면서 산행을 하게 됐다.

다리 힘 기르는 데는 등산만큼 좋은 게 없다. 그래도 그렇지 앞이 보이지 않는 몸으로 그 험한 산을 오를 생각을 했을까? 남편이 먼저 제안을 했단다.

세봉 오르는 길옆 계곡. 부부의 소곤거림이 물소리와 섞여 졸졸 흐른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세봉 오르는 길옆 계곡. 부부의 소곤거림이 물소리와 섞여 졸졸 흐른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이 사람을 사귀게 된 곳이 소백산입니다. 신혼여행도 한라산으로 갔지요. 그렇게 산을 좋아했어요. 아내가 시력을 잃고 난 뒤 우연히 집 근처 청량산 입구를 지나가다가 한번 올라볼까 하고 발걸음을 떼었는데 쉬엄쉬엄 오르니 갈만하더군요. 그렇게 청량산을 몇 번 오르내리다 문득 다른 산이라고 못갈 게 뭐냐. 가자, 가보자!”

동네를 떠나 원정간 첫 산은 횡성에 있는 어답산. 그 뒤로 한달에 한번 내지 두번 산악회를 따라 꼬박꼬박 산을 다녔다. 벌써 만 3년 됐다.

이 부부가 산을 오르는 법
“업어.” 순간 잡은 손을 풀고 배낭 위에 두 손을 얹는다. 진짜 업히는 게 아니라 남편의 배낭에 손을 얹고 따라가는 것이다. 평탄하면서도 좁은 산길을 가는 그들 부부만의 방법이다. 암벽을 만나면 손을 잡고 오른다. 내려올 때는 안전한 곳을 디딜 수 있도록 발을 잡아준다.

부부는 쉼 없이 대화를 한다. 힘든 오르막길에서도 도란도란 소곤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늘 붙어사는 부부가 뭐 그리 나눌 말이 많을까.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길가 키 작은 풀들이 수군거리는지 앞서가는 부부가 속삭이는지 도무지 분간을 못할 지경이다.

비교적 평탄한 길은 아내가 남편의 배낭에 손을 얹고 간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비교적 평탄한 길은 아내가 남편의 배낭에 손을 얹고 간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문득 스치는 생각. 그렇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산길 아름다운 풍광도 소용이 없구나. 그러고 보니 남편은 그 유명한 내변산 절경 앞에서도 “거, 바람 참 시원하다”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대신 부부간의 자잘한 일상의 대화가 개울처럼 졸졸 흐른다.

험한 암벽을 내려갈 때면 남편의 말수가 줄어든다. 멀쩡한 사람들끼리 갈 때도 “위험하니 조심해라” 한마디 할 법한데도 “별거 아냐”라고 넘긴다. 다만 더 할 수 없이 긴장된 얼굴에 땀방울만 구를 뿐이다.

“위험하다라고 말하면 발을 떼지 못해요. 그렇지 않겠어요? 처음부터 안보였으면 몰라도 산이 어떤 곳이라는 걸 다 아는데 머리 속에서 낭떠러지가 그려지면 발걸음이 떨어지겠어요?”

그렇다하더라도 아내가 모를 리 있을까? 바위투성이 길을 내려가기에 앞서 멈추더니 연신 손바닥으로 땀을 씻어내는데 맞잡은 손이 빠질까봐 그런단다. “장갑을 끼면 좋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러면 감각을 놓친단다.

"위험하니 조심해"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 순간 아내의 발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위험하니 조심해"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 순간 아내의 발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꼭 잡은 손과 손의 높낮이, 손가락과 손바닥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로 앞선 남편 뒤를 따라가는 아내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진다는 것. 이렇게 남편은 아내의 눈이자 때로는 발이 된다. 그 눈이자 발 덕분에 아내는 40여 회가 넘는 산행을 하면서도 엉덩방아 한번 찧지 않았단다.

부부는 정상에서도 쉬지 않는다. 남들이 앉아서 쉴 때도 잠시 서서 한숨 돌리고 이내 길을 간다. 난코스라도 만나면 남보다 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산악회 일정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내변산 숲이 울창한 절경 앞에서도 남편은 "바람 참 시원하다"라고만 한다. 보이지 않는 배려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내변산 숲이 울창한 절경 앞에서도 남편은 "바람 참 시원하다"라고만 한다. 보이지 않는 배려다. 2005년 6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우리는 보스턴으로 간다
부부에게는 목표가 있다.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완주.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눈이 보이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는다. 때문에 실명이라는 시련 앞에서도 부부는 명랑하다. “이야, 큰 거 한 두수는 건지겠는데?” 하산 길에 만난 저수지에서 남편은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입심이 세다 했더니 역시나. 25년 조력을 지닌 낚시꾼이란다. 엊그제 밤낚시를 갔던 초평저수지에서 46cm짜리 붕어를 잡았다며 폰카메라로 찍은 걸 보여준다. 낚시꾼인 남편은 아내 때문에 산을 오르고, 담배를 끊고, 마라톤 연습 중이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누군가와 줄을 묶고 뛰어야 하는데 아내가 원하는 보스턴 마라톤대회까지 함께 할 동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예산 벚꽃 마라톤을 처음으로 함께 뛰었다. 누군가의 눈이 된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니 눈이 아니라 손발이 다되고 싶은 마음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르다. 배려가 일상이자 삶이 되어야 가능한데 이는 곧 자기의 삶 또한 상대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김효근·김미순씨 부부는 둘이자 하나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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