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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명인별곡] 출세는 못했지만 꿈은 이뤘다 희세의 응사 박용순 명인
[명인별곡] 출세는 못했지만 꿈은 이뤘다 희세의 응사 박용순 명인
  • 박지원 기자
  • 승인 2015.02.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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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여행스케치=대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무형문화재 매사냥. 그나마 실오라기 같은 명맥이라도 애오라지 유지된 건 어느 응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출세 따위 연연치 않고 옛 것을 지키고자 옹고집처럼 내달린 45년 응사 인생 박용순 명인. 그의 매사냥 사모곡이 울려 퍼진다.

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 공연장이 붐비기 시작한다. ‘겨울방학 무형문화 놀이학교’가 열리는 까닭이다. 자리를 꿰차고 앉은 관객의 대부분은 순진무구한 눈망울의 어린이들이다. 매를 보고 만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하나같이 상기된 표정 일색이다. 마침내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8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매사냥의 기능보유자 박용순 응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우리나라의 매사냥 기능보유자는 박 응사와 전북 진안의 박정오 응사 둘뿐이다.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공연장의 무대 한쪽에 놓인 횃대에는 매가 앉아있다. 맹금류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다시 오기 힘든 기회라고 생각하며 바투 다가간다. 타오르는 눈빛, 꽉 다문 날카로운 부리, 움킨 것은 절대 놓지 않을 발톱, 매끈한 듯 다부진 몸통. 늠름하니 참 잘생겼다고 생각할 즈음 박 응사가 ‘버렁이’를 낀다. 매의 발톱으로부터 팔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가죽 장갑이다. 박 응사가 버렁이를 꼈다는 건 뭔가를 준비한다는 것일 게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호루라기 소리가 ‘삑’하고 허공을 가른다. 그런데 박 응사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무대 위에 있는 매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무대로부터 수십 보 떨어진 공연장 입구 쪽에도 횃대에 앉은 또 다른 매가 있다. “설마 박 응사의 눈길이 머문 곳이 무대 밖 저 멀리 앉아 있는 매는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고 한들 녀석이 알아듣고 날아올까”라고 생각한 찰나, 횃대를 박차고 오른 매가 미끄러지듯 무대 위로 날아와 모형 사냥감을 낚아챈다.

눈으로 겨우 좇을 정도로 빠르다고 탄복한 순간 의문점이 뇌중을 파고든다. 야생의 매를 어떻게 길들인 걸까? 고집이 센 사람을 일컫는 옹고집을 떠올리니 더욱 의아하다. 옹고집은 길들이기 어려운 매를 응고집(鷹固執)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으니 말이다. 이에 박 응사는 “길들인다는 것보다 가까워진다는 표현이 맞죠. 그 과정은 남녀 간의 사랑과도 같아요. 찰싹 붙어서 밤낮 없이 감정 교류와 스킨십을 해야만 매가 마음을 연답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매를 사랑으로 보듬는 게 선행돼야만 가능한 매사냥은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지녔고, 우리나라 또한 진배없다. 무엇보다 세종과 매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매사냥 애호가였던 세종은 명나라에서 말 2만5000마리를 조공으로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는 조선의 군사력을 해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혜를 짜낸 세종은 명나라 선종제가 매사냥을 좋아한다는 점을 간파, 15마리 매로 2만5000마리의 말을 대신했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시치미 떼다’도 매와 관련된 관용구다. 시치미는 매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 매의 꽁지에 단 일종의 표식인데, 본래 주인이 잃어버린 매를 다른 사람이 잡아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매인 것인 양 행동한 것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 매사냥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고려시대에 매사냥을 담당하고자 설치한 응방,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한 해동청을 통해서도 쉬이 알아챌 수 있다.

박용순 응사는 이러한 매사냥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을까. 그는 유년시절 하늘을 나는 매를 보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매를 사모했다. 그 무렵 산에서 주은 새끼 새매와의 인연으로 그의 매사냥 인생은 시작됐다. 성인이 돼서도 일편단심 매사냥이었고, 군복무 시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대장의 허락 하에 매를 키웠지요. 점호를 할 때면 매를 침상 끝에서 끝으로 날아가게 했어요. 자연스럽게 중대의 상징이 됐답니다.”

전역을 하고 직장 전선에 뛰어들긴 했지만 매에 대한 동경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내 매사냥의 대가를 수소문한 끝에 충남 금산에 가면 매사냥의 명맥을 잇고 있는 마지막 인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강종석 응사였다. 금산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강 응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6년간 매사냥을 배웠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시작했지요. 강 응사 곁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덕분에 스승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지요.”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3월 사진 / 박지원 기자

 

부단한 매진 끝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최고의 응사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박 응사는 일본의 초청으로 도쿄에서 매사냥 시연과 강연에 나서고, 드라마 <주몽>, <무인시대> 등 사극에도 출연해 매사냥을 선보이는 등 우리나라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민중과 고락을 함께 해온 매사냥을 계승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후학들과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를 만들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전승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박 응사는 매사냥이 실낱같은 생령만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당에 국가적인 지원이 절실한 시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직도 매의 눈을 보면 설렌다는 박 응사. 열두 살 때 새끼 새매와의 만남으로 출발한 그의 올곧은 매사냥 인생은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출세는 못했지만 성공한 인생이지요. 어릴 적 꿈은 이뤘으니까요” 애틋함이 묻어나는 그의 말에서 왜 그가 최고의 경지에 오른 매사냥꾼, 이른바 응사란 칭호를 갖게 됐는지 새삼 알아차린다.

INFO. 한국전통매사냥보전회
홈페이지 kfa.ne.kr
주소 대전시 동구 이사로194번길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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