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53] 소안의 봄을 기다린다 전남 완도군 소안도
[김준의 섬 여행 53] 소안의 봄을 기다린다 전남 완도군 소안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5.02.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완도]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 나에게 ‘소안도’가 그런 곳이다. 나를 섬 문화에 빠져들게 하고, 섬 여행에 중독시킨 곳. 처음 소안도를 찾았을 때 그곳은 그저 그런 평범한 섬마을이었다. 섬에서 유일하게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는 허름한 여인숙이 하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나의 첫 섬 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안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앙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적힌 표지석이 반긴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소안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앙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적힌 표지석이 반긴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소안, 정말 편했을까

완도 향교지는 소안(所安)이 ‘다른 지역에 비해 기개가 용맹하므로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어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전한다. 그런데 섬의 역사를 살펴보면 편치가 않다. 제주와 뭍을 오가는 길목에 있었던 탓에 제주를 왕래하는 관리들이 곧잘 머물렀던 소안에는 그 흔적으로 두 기의 제주목사 영세불망비, 관찰사 송덕비가 남아 있다. 모두 섬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높으신 양반들에게 무슨 도움을 받아서 불망비와 송덕비를 세웠을까. 이런 비석의 뒷이야기를 보면 ‘강압적 자발’이 다반사다.

제주에서 해남이나 강진을 오가는 길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이다. 그 경계에 소안도가 있다. 내해와 외해를 가르는 길목이다. 뭍에서 제주로 가는 길, 섬과 섬 사이를 돌아 소안도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더라도 외해는 녹록지 않다. 반대로 제주에서 추자도를 거쳐 해남이나 진도로 들어갈 때 소안 바다로 들어서면 저승에서 이승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이 지역을 오가는 관리들은 소안에 머무르기 일쑤였다. 좁고 척박한 섬에서 관리들의 물목을 해결하기 위한 섬사람들의 고충은 오죽했을까. 짐작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1795년(정조 19) 제주를 왕래하는 관리의 횡포와 과도한 세금을 강제로 부과하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구폐절목(?弊節目)’이 마련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발길이 자꾸만 옛 기념탑으로 향하는 것은 험혹한 사회 분위기 속에도 소안인들이 지켜낸 항일 정신 때문이리라.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발길이 자꾸만 옛 기념탑으로 향하는 것은 험혹한 사회 분위기 속에도 소안인들이 지켜낸 항일 정신 때문이리라.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소안학교가 있던 자리에 새 가념탑과 기념관이 세워주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소안학교가 있던 자리에 새 가념탑과 기념관이 세워주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소안 선생님과 학생들은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로 성장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소안 선생님과 학생들은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로 성장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주민 대부분이 불온분자로 낙인찍혀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은 소안인들. 일제강점기는 물론 최근까지도 부모님의 기억을 지우며 살아야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주민 대부분이 불온분자로 낙인찍혀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은 소안인들. 일제강점기는 물론 최근까지도 부모님의 기억을 지우며 살아야했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항일의 땅, 해방의 땅
소안도는 허리가 잘록한 장구 모양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동부와 서부로 구분한다. 그 중심에 위치한 비자리 선창은 보길도와 노화도로 둘러싸여 계절풍과 파도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주민들은 이곳을 ‘버턴등’이라 부른다. ‘버턴’은 ‘벗터’로 해석할 수 있다. 소금을 굽던 곳을 이르는 말이다. 전통소금인 자염을 만들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소안학교도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항일운동 기념관이 자리를 잡았다. 당시 섬에서 만난 한 노인이 들려준 노래 ‘옥중가’의 일부다.

평안북도 마지막끗 신의주가목가
세상에 테여난지 몃해되연나
잇지못할 관게가 셍기엿구나
압되를 살페보니 철갑문이요

곳곳이 보이난 것 불근옷이라

소안 사람들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신의주 감옥에 간 지도자를 생각하며 엄동설한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이불을 덮지 않은 채로 지냈다고 한다. 소안학교는 일제강점기 빼앗겼던 토지를 되찾은 것을 기념해 주민들이 모금한 돈으로 만든 사립학교였다. 소안학교가 유명해지자 일제는 1927년 면사무소나 주재소 등 기관 근무자의 자녀들이 다닐 공립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소안학교 학생은 150여 명에 이르렀고 공립학교는 겨우 30여 명에 불과했다. 일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소안학교가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일제의 국경일을 휴일로 정하지 않았으며, 일장기를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교시켰다.

소안의 봄은 언제 오려나
해방 후 소안 사람들은 ‘항일운동의 기억’을 지워야 했다.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에 소안 출신 항일운동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적게는 50명, 많게는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마침내 1987년 12월 소안의 항일운동가 9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소안노인회가 중심이 되어 기념사업과 건립추진위원회도 만들었고, 노인회의 지신밟기와 출향 인사들의 기금을 마중물로 우여곡절 끝에 항일운동기념탑도 세웠다. 엄혹했던 시절에 가슴을 졸이며 모금을 해서 만든 탑. 내놓고 제대로 기념식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5년 후에는 정부가 소안학교 옛터에 기념관을 세웠다.

인구 3000여 명의 작은 섬에 건국훈장 서훈자만 20명, 감옥살이는 햇수로 모두 합해 300년에 이른다. 면 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유공자를 배출했다. 사회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도 80여 명이다. 항일운동에 참여했지만 자손이 없거나 돌볼 가족이 없어 소안 산천에 쓸쓸하게 묻혀 있는 이들도 있다.

여름철이면 밀물에 그물을 내려놓고 썰물에 나가는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캐막이 체험을 진행한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여름철이면 밀물에 그물을 내려놓고 썰물에 나가는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캐막이 체험을 진행한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미라리, 진산리, 소진리 등 곳곳에 아름다운 몽돌해변이 있다. 그만큼 파도가 거칠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미라리, 진산리, 소진리 등 곳곳에 아름다운 몽돌해변이 있다. 그만큼 파도가 거칠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제주의 올레처럼 돌담을 쌓았다. 그 위로 덩굴식물이 서로 얼기설기 의지하며 자란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제주의 올레처럼 돌담을 쌓았다. 그 위로 덩굴식물이 서로 얼기설기 의지하며 자란다. 2015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빤스고개를 넘다
소안면 맹선리에는 완도 보길면 예송리 상록수림과 함께 방풍림으로 쌍벽을 이루는 마을숲이 있다. 그런데 요즘 상록수림보다 더 인기가 좋은 곳이 ‘빤스고개’다. 경사가 심해 여자들이 치마를 입고 넘으면 팬티가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과 고개를 넘을 때 팬티가 땀에 젖을 정도로 힘들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스무 해 전에 걸어서 섬마을을 답사할 때 동진리를 가기 위해 나도 이용했던 고갯길이다. 당시 완도에서 출발한 객선은 비자리와 맹선리에 닿았다. 비자리, 이월리, 가학리 사람들은 비자리 선착장에서 내렸고, 맹선리와 진산리, 미라리 사람들은 맹선리 선착장을 이용했다.

가끔씩 당사도 사람들도 맹선리 선창에서 해남이나 목포로 가는 배를 탔다. 교통이 편리해 진산리보다 일찍 학교가 세워진 맹선리는 김 양식이 발달해 가난을 면할 수 있었다. 마을어장도 넓어 바다에서 번 돈으로 진산리의 땅을 사들였다. 논이라고는 모 한 포기 꼽을 곳도 없던 맹선리 사람들은 소안도에서 가장 넓다는 진산들에서 농사를 지어 맹선리로 옮겼다. 진산들의 절반은 맹선리 사람 것이었다.

사람들은 해가 질 때까지 하루에 대여섯 번 지게를 지고 빤스고개를 오갔다. 반대로 진산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고개를 넘었다. 어린아이들이 오가기는 벅찬 길이다. 정상인 시루떡재에 오르면 소안도와 보길도 사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맞은편으로 진산들과 몽돌해변이 아름답다. 나도 빤스고개를 넘어 서중리 마을회관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말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동진리에 사는 신면장이라는 사람이 냉장고에서 귀한 상어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 썰어주며 술을 권했었다.

이제는 진정 소안(所安)이기를
요즘 소안은 여름철이면 사람들로 넘쳐난다. 월항리의 개매기 체험이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 개매기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큰 바닷가 갯벌에 그물을 쳐 놓은 후 밀물 때 조류를 따라 들어온 물고기 떼를 썰물 때 잡는 전통 고기잡이 방식이다. 잡은 고기는 주민들이 직접 손질을 해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맛볼 수 있다. 또 미라리나 동진리에서는 아름다운 몽돌과 깨끗한 바다를 즐길 수 있다. 마을 골목은 돌담이 구성지고 마을숲이 아름답다.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준 자연에 섬사람들의 삶이 어우러진 마을. 이젠 아픔을 내려놓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소안의 봄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