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양양] 낙산사를 태운 산불에 이어 올해만도 두 차례나 큰 수해가 났지만 강원도 양양은 언제 찾아가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상처난 제 살이 더 아프면서도 세사에 지쳐 찾아온 자식에게 괜찮다며 토닥거려줄 것 같은 아버지 같은 힘찬 바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것이 대학교 3학년때였던 것 같다. 남자 동기생들이 하나 둘씩 입대하고 그 자리를 제대한 예비역 선배들이 채운 전공수업시간이었다. 30대 중반의 교수님은 3학년은 눈 깜짝할 새에 가고 4학년은 총알같이 지나가니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은 교수님의 표현보다 훨씬 빨리 흘러갔다.
그 이후 복잡한 듯하면서도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상은 더욱 더 빠르게 흘러갔다.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몇 살 하던 것이, 몇 년생 그러다가 이젠 무슨 띠라고 에둘러 말하게 된 것만 봐도 그렇다. 몇 년 전만해도 족집게로 하나씩 쏙쏙 뽑곤 했던 엄마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염색해드릴 때면 엄마가 느끼는 시간의 가속도는 또 얼마나 빠를까 생각한다.
강릉에서 속초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는 7번국도를 차들이 쌩쌩 달려간다. 표지판이 서있는곳이면 어느 곳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관광지임에도 차들은 속력을 줄이지 않는다. 다들 바쁜 일이 있나 보지. 현남면 광진리 바닷가에 자리한 휴휴암. 암자 이름치곤 참 특이하다 생각하며 차 속도를 줄여본다.
휴휴암(休休庵)은 몸도 마음도 모두 내려놓고 쉬고 또 쉰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미워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탐욕, 시기와 질투, 증오와 갈등과 대립, 기뻐하는 마음까지 팔만사천의 번뇌를 쉬고 쉬는 곳이란다.
원래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작은 암자에 불과했지만, 3, 4년전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사찰을 크게 지었다. 찾아간 날에도 사찰 한쪽에선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10여 년 전 찾아오는 이 없는 한적한 암자의 주지 스님은 우담바라가 핀 어느 사찰에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다는 뉴스를 접했다. 워낙 암자 살림이 궁핍했기에 스님은 우리 사찰에도 그런 진기한 꽃이 피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천일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사찰 어느 곳에서도 꽃이 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자 앞 바닷물 속에 잠겨있던 너럭바위 하나가 물이 빠지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커다란 바위에 파도가 부딪혀 물보라가 이는 모양이 마치 연꽃같았다. 기이하게 여긴 스님이 바닷가를 둘러보자 화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바위형상으로 누워 있었다.
바닷물이 들락날락거리는 해안가 돌무덤에 위치한 관세음보살 와불상은 보면 볼수록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관세음보살 모습 그대로이다. 와불상 오른쪽에는 관음보살을 향해 기어가는 형상의 거북바위가 있는데 부처님이 항상 데리고 다녔다는 남승동자의 현신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너럭바위 주변에는 발가락 모양이 선명한 발가락 바위와 발바닥이 갈라진 발바닥 바위, 달마대사의 얼굴을 한 얼굴바위 등이 흩어져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비룡관음전 앞에 서서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의 연꽃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1년이 시간을 되감기 하듯 빠르게 지나간다. 몸과 마음이 잠잠해진다. 점점 더 빨라지는 삶의 가속도를 늦출 수는 없을까? 아니 시간을 살살 달래서라도 천천히 갈 수는 없을까? 선문답같은 물음에 속으로 답해보지만 웃음만 나올 뿐이다.
매서운 바닷바람에 오래 서있지 못하고 옷깃을 여미고 발길을 돌린다. 다시 속도의 세상 속으로 돌아간다. 너무 익숙해서 놓쳤던 것들을 챙겨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