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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 에스프리] ‘죽기 전에 가봐야 할’ 노르웨이 피오르드 클래식 불후의 선율들의 고향
[지구촌 에스프리] ‘죽기 전에 가봐야 할’ 노르웨이 피오르드 클래식 불후의 선율들의 고향
  • 정길화 기자
  • 승인 2006.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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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늘 상상 속에 머물렀던 물에 비친 피오르드 절경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여행스케치=노르웨이] 협만(峽灣). 노르웨이말로 내륙으로 깊이 들어간 만(灣)이란 뜻의 피오르드. 검은 산은 만년설로 덮여있고, 눈이 시리게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 빙하가 녹아내린 물은 폭포수가 되어 비류낙하로 거침없이 흘러내린다. 강인지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를 깊고 푸른 물결은 수백만 년 전 빙하시대의 침묵을 안고 유장하게 굽이친다. 저 물 안에도 물고기가 살고 있을까. 있다면 어찌 생겼을까. 

해안을 따라 그림 같은 뾰족지붕집이 늘어서 있고 시쳇말로 카메라를 갖다 대기만 해도 그림이다. 피오르드는 선계인가 속세인가.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대체 무슨 고민이 있을까. 내가 정녕 죽기 전에 한번 가볼 수는 있을까…. 학창 시절 지리시간에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의 자연을 배울 때, 혹은 지구과학 시간에 빙식(氷蝕) 지형에 대해 공부할 때 노르웨이의 피오르드가 교과서에 나오면 나도 몰래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음악 시간에 그리그의‘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를 때, 미술시간에 뭉크의 그림을 볼 때 그들의 예술적 영감에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북구의 백야와 피오르드의 풍경이 떠오르며 내게는 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 피오르드를 좀 더 실감나게 볼 기회는 방송사에 입사하고 나서다. 아쉽게도 육안이 아니고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서다. 1980년대 중반 후반에 MBC에서 방송된 <명곡의 고향>이라는 음악 다큐멘터리가 있었다.인류사에 빛나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과 작품세계를 기행하는 프로그램이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솜사탕 같기도 하고 빙수 같기도 한 노르웨이의 빙하.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삼각깃발을 선두로 빙하원정에 나선 탐험객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이 당시 나는 북유럽, 독일, 영국 등을 취재한 팀과 달리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쪽을 취재한 팀에 조연출자로 소속되었다. 덕분에 라틴의 정열과 낭만을 체험하고 목격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꿈꾸던 피오르드와는 인연이 없었는지 맺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시리즈 방송을 앞두고 두 팀이 현지에서 찍어온 그림을 놓고 프로그램 전체 타이틀백(T/B 제목이 들어가는 밑그림)을 협의했을 때 곧장 의견일치를 본 것은 바로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풍경이었다. 유럽의 많고 많은 그 빛나는 풍경들을 다 두고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타이틀에 나온 장면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은 송네 피오르드 원경인 듯하다.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물빛은 푸른데 분위기는 만년설의 흰빛과 어우러져 신비하고 적요(寂蓼)하다. 그림은 풀 샷에서 천천히 줌인을 하고 계곡 한가운데에서 클래식 음악의 거장들 얼굴이 하나씩 나오는 그런 영상의 타이틀이었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플뢰위엔 산에서 내려다본 베르겐 항구.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이를 구상한 연출자는 필경 피오르드와 같은 아름다운 풍경처럼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이 시간의 마모성을 뛰어넘어 오래도록 인류에게 전승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상징적으로 함축해 보여주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타이틀의 음악은 이탈리아 작곡가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전원기사)> 중 ‘인터메조’를 깔았었는데 피오르드 풍경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그래서 지금도 내게 피오르드 하면 떠오르는 음악은 ‘페르퀸트’보다 ‘카발레리아 루스트키나’이니, 그리그가 알면 무척 실망할 일이다. 여하튼 <명곡의 고향>의 그 타이틀을 볼 때마다 나는 혼자 읊조렸다. ‘저기를 언제 가보나. 죽기 전에 가볼 수 있으려나….’ 

<죽기 전에 가봐야 할 1,000곳>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정말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지, 한동안 <죽기 전에…>시리즈가 서점가를 풍미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진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어떻든 그 책을 사서 보았더니 역시 피오르드가 있었다. 

여하간 그동안 머나먼 아프리카 오지나 카리브 해의 쿠바, 수교 전의 동구 헝가리 등을 갈 일은 있었어도 북유럽을 갈 기회는 없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개비처럼 스스로 달려 나가라고 누가 그랬던가. 지난 7월 드디어 노르웨이의 피오르드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주판알을 튀기는 오랜 궁리 끝의 일이었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뮈르달-플롬 사이에 있는 빙하 폭포.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빙하를 체험한다. 그 중 유람선에서 보는 피오르드의 절경.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그동안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토대로 패키지 관광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격 대비 효율성과 현지에서의 편의성은 패키지의 장점이다. 초행길의 서투름을 패키지의 ‘삼각 깃발’ 아래서 보호받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융통성이 없고 단조로운 것은 이 일정의 치명적 약점이다. 뭉크 기념관도 보고 싶고 카를 요한의 거리도 걷고 싶은데 무심한 깃발은 일정을 재촉한다. 입센 박물관은 말도 못 꺼낸다. 노벨 평화상을 시상하는 오슬로 시청사와 비겔란 조각공원을 가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주마간산 와중에 후일을 기약해 보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반(半 ) 90년’이 걸렸다. 사람일은 알 수 없지만 다시 온다는 것은 아마도 기약이 없는 얘기일 터다. 그러나 입이 부어 툴툴거리던 오슬로 시내 관광이 끝나면서 여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드디어 학창 시절 이후 30년을 꿈꾸던 피오르드 답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로프트후스의 올렌스방 호텔 앞 바다. 호수가 아니라 바다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전형적인 노르웨이 마을 풍경.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그로부터 70여 시간. 너무나 진부한 말이지만 참으로 ‘백문이불여일견’이다. 답사는 예이랑게르 피오르드에서 출발해 송네 피오르드, 하르당게르 피오르드 등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4대 피오르드 중 3곳을 망라하게 된다. 8박 9일 중 4박이 노르웨이일 정도로 이 일정은 피오르드 기행을 원없이 가능하게 한다. 유람선으로, 트램카로, 철도로, 버스로, 마차로, 도보로 피오르드와 빙하를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각본 없이 이룬 자연의 아름다움, 100만년의 시간이 거둔 위대한 승리, 인간이 이들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겸손함과 의지가 총화를 이룬 가없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된다.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다. 아니 필요성을 거부한다. 그냥 보고 느끼면 족할 것을 무엇 하러 그리 표현하려 애쓸 것인가. 독자들께서도 섣부른 글보다 엄선한 사진을 직접 감상하시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한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1,000곳>을 쓴 패트리샤 슐츠는 “바깥세상으로의 여행은 내면의 세계를 비추어준다”고 설파했다. 여행을 하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본다. 피오르드 앞에 서면 인간의 왜소함과 무모함을 자각하게 된다. 대자연보다 위대한 지구의 조각가는 없는 것이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오슬로 시내 식당가 모습.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도 한국은 이미 친숙한 나라였다. 2006년 11월. 사진 / 정길화 기자

그리고 노르웨이의 잘 보존된 자연환경에 비해 어지럽기만 하고 날로 황폐해지는 우리네 풍광이 떠올라 답답하고 처연해진다. 그러나 경치에 취해 있기만 할 일이 아니었다. 피오르드의 만년설과 빙하가 겪는 수난의 현장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피오르드의 빙하는 갈수록 물러난다고 하는데 육안으로도 이를 알 수 있었다.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는 녹기를 반복하지만 빙하의 융해선이 해가 다르게 후퇴하는 것이었다.

문득 영화 <투모로우>의 장면과 겹쳐지면서 지금이 간빙기(間氷期)임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또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이처럼 무절제하게 질주(疾走)하다가 마침내 빙하기가 예고 없이 다시 엄습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나 모름지기 나그네의 심사는 돌아서면 끝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나는 지금 이렇게 그저 피오르드의 추억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그때까지 피오르드는 잘 있을까. 참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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