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태안] 태안반도 남서쪽 끝자리 육지를 꿈꾸는 섬에는 곧게 뻗은 다리가 놓였다. 뱃전에 앉아 쉬던 갈매기들이 먼저 알고 일제히 끼룩거리면 한적했던 포구에 싱싱한 삶의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한다.
충남의 바닷가는 언제 떠나도 부담 없다. 도로가 잘 닦여있어 차가 달리기 좋고 꼼꼼한 일정표 없이 떠나도 길목마다 둘러볼만한 명소가 널려있다. 게다가 해안선을 끼고 있어 계절별 풍성한 먹을거리로 넘쳐나니 주말이면 늦잠 잔다 타박하는 가족들을 차에 싣고 넉넉히 다녀올 만 하다.
태안반도 남서쪽 끄트머리에 있어 찾는 이라곤 고깃배들과 낚시꾼들이 고작이던 신진도 안흥항. 십여 년전 신진도와 안흥을 잇는 다리가 생기면서 신진도 외항쪽으로 대형 주차장이며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들어섰다. 그러나 관광명소가 넘쳐나는 태안에서 시골길을 한참이나 달려야 하는 안흥항을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1시 30분 신진도 외항 선착장. 태안해안국립공원을 둘러보는 유람선의 시동이 걸린다. 추운 날씨임에도 사람들은 갑판 위에서 출발의 설렘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배가 서서히 포구를 벗어나자 과자를 받아먹으려는 갈매기 떼들이 쉴 새 없이 뱃전을 맴돈다.
신진도 앞 바다의 섬은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20여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위에 점점이 흩어졌던 섬들이 다가와 안겼다가 이내 저만치 멀어져 간다. 뱃길을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바위섬들은 이름도 없다. 하늘을 향해 호탕하게 웃느라 얼굴이 불콰해진 거인바위, 몸을 불쑥 일으켜 세운 사자 바위, 바짝 엎드려 헤엄치는 거북 바위, 피노키오의 옆모습을 닮은 코 바위 등 모양만큼이나 이름도 부르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신진도 앞바다의 섬들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자연이 비교적 싱싱하게 보존되어 있다. 동백숲, 석란 등의 희귀식물과 괭이갈매기, 가마우지 등의 온갖 철새들이 낙원을 이루며 살고 있다.
유람선이 지나가는 뱃길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가의도는 날씨가 좋을 때면 잠시 배가 서기도 한다. 약 400년전 ‘가’씨 성을 가진 중국인이 이주해 와 자신의 성을 따서 섬 이름도 가의도라 지었다고 한다. 현재 50여명의 주민들이 사는데 이곳에서 나는 미역과 육쪽마늘은 질 좋고 맛이 좋아 6월이면 이를 사려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기다란 백사장이 예쁘고 깨끗해 여름철 나만의 파라다이스로 다시 찾으면 좋겠다 싶다.
신진대교를 빠져나오자 안흥 내항 옆으로 아담한 성문이 나온다. 1655년 조선 효종때 쌓은 석성(石城)이다. 좀 전의 유람선을 탄 시간이면 중국땅에 닿을 정도라고 하니 한때 신진도가 중국과의 교역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성문을 지나 왼쪽으로 가파른 길을 오르자 태국사라는 작은 절이 나온다. 백제 무왕때 창건한 절로 외적이 침입하면, 이 절의 주지가 직접 승군을 지휘했다고 한다. 안흥성내에 사찰을 두어 승군이 서해안의 경비를 담당했을 정도였으니 번성기엔 절의 규모도 상당히 컸을 것이다. 태국사는 20여 년 전 법당 하나와 요사채가 세워지면서 예산 수덕사의 말사가 되었다.
사찰 마당에 막 들어서는데 절을 관리한다는 비구니 스님이 차를 몰아 출타하신다. 따뜻한 차 한 잔 얻어 마시려 했는데 참 운도 없다. 사찰 옆 밭고랑을 따라 난 능선을 조금 내려가자 곧게 뻗은 신진대교와 내항이 발밑으로 펼쳐진다. 다리 너머 언덕으로 해가 서서히 내려않을 채비를 한다. 안흥팔경으로 꼽힐 만큼 신진도의 낙조가 볼만하다 하니 찬란한 절정을 아니 볼 수 없잖은가. 서둘러 대교를 다시 넘어 신진도 외항쪽으로 달려갔다.
수협의 마지막 경매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인지 포구 앞에선 배를 댄 어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요즘 서해안은 대구잡이가 한창이라던데 만선을 이룬 배들은 활력이 넘쳐난다. 서쪽하늘은 하늘색 바탕위로 엷은색 붉은 물감을 쓱쓱 붓질을 해 놓은 듯 하다. 해지기 전 서둘러 저녁식사를 마치려는 듯 갈매기들이 부산스레 포구 안을 날아다닌다. 정박해 놓은 포구의 배들 너머로 아련하게 하루해가 넘어간다. 배꼽시계가 꼬르륵 밥때를 알려온다.
해 저물기 전까지는 신진도 안흥 외항이 볼만했다면 해가 저문 후엔 내항쪽이 운치있다. 30분마다 색깔이 바뀌는 신진대교의 야경을 조망하기 좋을뿐더러 푸근한 저녁 어촌 풍경을 맛보기에도 내항쪽이 낫다. 신진도 방파제에서 입질을 시도하던 낚시들꾼들도 밤이 되자 내항쪽 대교 조명 아래서 밤낚시를 즐긴다.
해가 일찍 지는 겨울이라 많은 것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닷가의 싱싱한 삶의 내음을 가슴 가득 담아왔으니 새로이 도심의 일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