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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 기행] 파리의 맨 얼굴,  파리지앵의 하루
[지구촌 기행] 파리의 맨 얼굴,  파리지앵의 하루
  • 황성혜 기자
  • 승인 2007.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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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파리를 돌아볼 수 있는 버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여행스케치=파리] 파리를 다녀온 사람들은 흔히 불평을 늘어놓는다. 지저분하고 시내는 복잡하고 날씨는 우중충한데다가 왜 그리 파리 사람들은 까다롭고 불친절하냐면서. 그뿐인가. 느려터지고 답답한 관공서 직원 때문에 분통 터뜨리다 보면 깊고 그윽한 파리는 저만치 멀리 달아나버리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곳은 묘하다. 친구처럼, 애인처럼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한다. 하긴 프랑스 국민도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라 그 자체의 딴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2년간의 유학 생활을 한 내게 파리는 무덤덤해진 ‘남편 같은’ 도시가 아니라, 여전히 투닥거리며 싸우면서도 마음 설레게 하는 ‘애인 같은’ 도시다. 그 도시와 그 속의 사람들, 클린징한 그들 삶을 잠깐 훔쳐보기로 하자.

깜깜한 겨울날 새벽 6시, 카페 내부에 전등이 켜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도시는 그렇게 살아난다. 카페 주인은 밤새 테이블에 걸쳐놓았던 의자를 하나둘씩 내린다. 커피 기계에 스위치를 넣으니 보글보글, 끼르륵끼르륵 커피 끓는 소리가 들린다. 머플러를 두른 아저씨가 신문을 들고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러고는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찬 바람이 부는 겨울, 파리엔 머플러와 겨울 코트가 흩날린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이른 아침 파리의 카페엔 혼자 신문을 보는 파리지앵들로 가득찬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11월쯤 되면 파리는 트렌치 코트가 아닌 두툼한 겨울 코트로 갈아입는다. 아침 바람이 싸하게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거리마다 머플러가 넘쳐난다. 겨울 여행 준비를 하는 사람, 세일 쇼핑을 기다리는 사람, 노엘(크리스마스)을 앞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개선문과 콩코르드 광장을 잇는 대로에 서 있는 가로수, 수십만 개 되는 꼬마전등이 그 나무들에 매달려 반짝거린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캐롤 송을 듣다보면 차갑고 어두운 생각은 녹아 없어지고 맑고 밝은 기운이 내 속에서 샘솟는 것 같다. 노엘을 뒤로 하고 다음 시즌을 클릭한다. 새로운 한 해가 열린다.

바캉스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서로를 반기고 새해 인사를 나눈다. 그럴 때면 여기저기에서 ‘쪽쪽’ 소리가 들린다. 양쪽 뺨을 두 번 마주치면서 입으로 ‘쪽’ 하는 소리를 낸다. 프랑스어로 ‘비주’(bisous)라 불리는, 볼 뽀뽀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길가의 간이매점 키오스크.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옆에 있는 '카페 드 라페'는 유학생들 사이에 평화 다방으로 불린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업무상 만나는 자리에서야 악수를 하지만 친구와 애인, 가족끼린 무조건 이 인사를 한다. 손에 아무리 큰 짐을 들고 있어도, 아무리 주변이 정신없이 복잡한 상황이어도 이 비주 인사는 빠지지 않는다. 이건 프랑스에서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요, 정이다.

2월쯤 되니 코끝이 쨍한 추위가,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아, 토요일이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집 옆 빈터에 어느새 장이 들어섰다. 징그럽게 털이 숭숭 달린 닭과 오리, 가재미와 홍합, 수제 요구르트와 각종 올리브, 없는 게 없다. “자, 골라보세요. 오늘 올리브가 좋~습니다.”

참, 오늘은 햄에 곁들여 먹을 멜론을 사야한다. “아저씨, 여기 멜론 한개 주세요”, “언제 먹을 건가요?”, “글쎄, 내일쯤?”, “내일 언제요? 오전, 아니면 오후?”

느긋하고 넉살 좋아보이는 과일 가게 아저씨, 생김새와 달리 왜 이리 치밀하게 따지실까. 아저씨, 오전에 먹으면 어떻고 오후에 먹으면 어떤가요? “멜론, 오후 3시반에 먹겠다”고 보고라도 해야한다는 말인가. 참 수다스럽기도 한 아저씨다.

“멜론 먹을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시면 딱 그때 맛있게 먹을 걸로 골라드리려고 그런다니까. 너무 물러도, 너무 딱딱해도 안 되거든요.” 아이고, 알았어요, 아저씨,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에펠탑은 파리지앵에게, 도시를 지탱해주는 힘과도 같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테이블에 꽃처럼 피어있는 에스프레소 커피.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홍합 한 봉지와 따끈한 바게트 반쪽을 사들고 들어온다. 기쁜 마음으로 집 앞에 왔는데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거지 한명이 와인을 들이켜 마시고 있다. 저 아저씨도 주말을 즐겨야지 뭐.

화이트 와인을 넣고 생크림도 곁들여가며 홍합을 푹 삶았다. 홍합 입이 하나둘씩 열리는데 내 마음도 열리는 듯하다. 파슬리 가루를 좀 뿌리고 아직 식지 않은 바게트 몇 쪽 썰어놓으니 근사한 브런치가 된다. 

날이 풀리긴 했나보다. 강아지 부대가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 같다. 그래 오늘은 모처럼 좀 걸어보자. 편한 신을 신으면 마음 한구석이 괜히 든든하다. 쿠션 좋은 신발에 몸을 실으니, 발걸음도 가볍다. 

월요일 아침, 마음도 가볍게 현관문을 나선다. 지하철역에 들어서는데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파리 시내의 연례 행사, 바로 ‘시위’다. 오늘의 주제는 또 무엇일까. 다행히 지하철이 운행은 되나보다. 콩나물 시루가 된 열차가 서 있길래 얼른 탔는데, 한참 떠날 생각을 않는다. 그러더니 이미 많이 들어본 방송이 흐른다. “저희는 오늘 파업합니다. 조심해서 내려주세요.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어둡고 칙칙하지만 파리의 지하철 안에는 진짜 파리지앵의 삶이 살아있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지하철 복도를 걷다가 만나게 되는 거리의 악사.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어느덧 파리지앵이 긴 바캉스에서 돌아오는 시즌이다. ‘긴 방학’에서 깨어난 파리는 원래의 파리로 되돌아간다. 흥겹고 들떴던 연말연시의 마음은 이제 날려버리자. 무거운 노트북을 짊어지고 전철을 타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파리 국립도서관은 중심에 식물원 같은 공간이 있는, 독특한 건축물이다. 날씨가 더우면 에어콘 바람을 쐴 겸 가고, 주말에 아무 할 일이 없으면 책이라도 좀 읽고, 아니면 친구들이라도 우연히 만날까 싶어 가기에 적격이다. 거대한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식물원 광경이 좋고, 높은 천장의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좋고, 그런 공간에서 책장 넘기는 게 무엇보다도 좋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아저씨가 열차칸에 오른다. “메담 에 메시에, 저는 직장을 잃은 가장으로, 집에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습니다. 이제는 술 끓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데 이런 저를 격려해주세요. 몇 센트도 좋고, 식당 식권도 좋고 다 좋습니다. 아니면 미소라도 제게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저 아저씨는 오늘 또 몇 차례나 저 똑같은 말을 할까. 

오후에는 모처럼 친구 두 명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다. 뤽상부르그 정원 근처의 오래되고 허름한 식당에 갔다. 로제 와인 한 병에 구운 가지와 토마토를 전채 요리로 시키고, 메인 요리로는 닭고기 구이와 가자미 구이 등을 주문했다. 그렇게 ‘음식 여행’은 시작된다. 여정의 신호탄을 알리는 전채가 시작됐고 허름한 성찬이 끝나는 슬픔은 들척지근한 크렘블레 디저트로 달랬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파리 곳곳엔 늘 다양한 주제의 시위가 연중행사로 벌어진다.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파리 센 강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한 커플. 2007년 1월. 사진 / 황성혜 기자

한약처럼 쓰디 쓴 에스프레소 한잔이 개운하다. 약간 올라온 취기가 흥겹다. 오늘은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야지. 낮에도 예쁘지만 밤에 더 예쁜 파리를 느끼고 싶으니까. 파리는 ‘불빛의 도시’다. 센 강변을 지나 달리는데 불을 훤히 밝힌 에펠탑과 앵발리드, 알랙상드로 3세 다리가 보인다. 햇살이 사라진 어두워진 파리를 지켜주는 이정표다. 마음 한 구석이 푸근해진다.

튈르리 공원에는 오늘 따라 꼬마등을 밝힌 회전 기구가 천천히 돌고 있다. 아이들은 밤 11시에도 덤블링 기구에 올라 펄쩍펄쩍 뛰고 있다. 파리의 하루가 또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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