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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원도심 여행 ③] 좁지만 속 깊은 처마와 처마 사이 춘천 약사동 망대골목~효자동 낭만골목
[원도심 여행 ③] 좁지만 속 깊은 처마와 처마 사이 춘천 약사동 망대골목~효자동 낭만골목
  • 주성희 기자
  • 승인 2014.0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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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여행스케치=춘천] 혼자 지나기도 비좁은 길. 어깨를 스치는 낮은 담벼락 안으로 남의 집 앞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빨래를 걷으러 나온 안주인과 눈이 마주치면 담 너머에 서서 한참 동안 안부를 주고받는 골목. 그리운 옛 골목길이 춘천의 한가운데 핏줄처럼 퍼져 있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2층에 태워 데려갔다. 대한민국 유일의 2층 열차다. 이름은 ITX-청춘. 속도는 KTX 다음으로 빠르다. 2010년 경춘선 전철이 놓인 날, 춘천 가는 기차의 대명사 무궁화호가 멈췄다. 2년 전 ITX-청춘 열차가 경춘선 위를 달리지 않았더라면 기차로 떠나는 춘천 여행의 낭만은 영영 사라질 뻔했다. 잃어버릴 뻔한 낭만을 지켜준 것도 고마운데 예전보다 2m 이상 높은 곳에서 경치를 바라보는 신선한 재미까지 주니 춘천 가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춘천역에는 한림대 출신 청년 넷이 공정여행 전문 사회적기업 ‘동네방네’의 원도심 투어 코디네이터 염태진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가이드라니! 춘천 여행이 참말 새로워졌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약사동 망대골목 입구. 골목은 이내 좁아져 구불구불 동네를 휘감는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낭만시장’으로 거듭난 ‘양키시장’

춘천역에서 약사리고개까지, 춘천의 옛 시가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과거 춘천 시민의 발길은 사방팔방으로 폭넓게 이어졌다. 하지만 명동 일대에 도심 기능이 집중되고 그 주변은 오가는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원도심으로 물러났다. 현재 춘천 최고의 번화가 명동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면 굴곡진 고갯길에 오래된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을 춘천의 젊은 사람들도 잘 모를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보통 역전은 복잡하기 마련인데 춘천역 앞은 한산하지요? 미군 캠프페이지였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춘천이 한국전쟁에서 국군이 첫 대승을 거둔 곳인 거 알고 계셨나요?”

춘천역에서 명동까지는 걸어서 20분. 염태진 씨 안내를 받으며 춘천의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춘천대첩은 6.25 전쟁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사흘간 지속된 춘천대첩 당시 춘천의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북한국의 남하를 막아냈다. 전쟁 후 전국에 들어선 미군기지 가운데 시민에게 개방된 곳은 춘천이 유일하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한때 ‘양키시장’으로 성행했던 중앙시장에는 아직도 미제 용품을 파는 가게가 제법 있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춘천 원도심은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하면서 형성됐다. 일제시대부터 장이 서 춘천에서 제일 오래된 재래시장인 중앙시장도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면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다시 장이 열렸다. 미군 구제용품과 보급품을 거래하는 일명 ‘양키시장’으로 호황을 누리며 원도심의 대표시장으로 성장했는데,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상권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바로 옆 명동이 겨울연가와 닭갈비로 사람들이 바글대는 모습을 쓸쓸히 지켜보던 중앙시장이 ‘낭만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재도약을 시작한 것은 4년 전 일이다. 어두침침했던 시장 골목에 귀여운 요정, 익살맞은 슈퍼맨 벽화를 그리고 다양한 미술작품을 설치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재탄생을 꿈꾸고 있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낭만시장’으로 거듭난 중앙시장의 깜찍한 벽화 요정.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동네를 핏줄처럼 연결해주는 옛 골목

시장을 빠져나오면 약사동과 효자동을 잇는 춘천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 나온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한약방이 즐비했다고 해서 약사리고개라 부른다. 고갯길이 이번 겨울에 4차선 도로로 확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짐을 옮기는 손수레가 쉬어 가는 휴게소가 있을 정도로 고개 위로 많은 사람들과 물자가 오고갔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일제시대 화재 감시 임무를 맡았던 망대는 이제 민방위 사이렌을 울린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중앙시장에서 길을 건너지 않고 고개를 오르면 죽림동성당에 이른다. 6.25전쟁으로 도심 대부분이 폐허가 됐지만 신기하게도 지붕이 뚫린 것 외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성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당과 고갯길을 마주보고 선 동네가 약사동이다. 옛날에는 약사동에 춘천형무소가 있어 포승줄에 묶인 독립투사들이 시내로 재판을 받으러 가기 위해 약사리 고갯길을 넘었다. 그때 독립투사들에게 몰래 주먹밥과 물을 건넸던 약사동의 풍성한 인심은 이제 만나보기 힘들다. 도시개발을 앞두고 빈 집들이 많아 사람 그림자조차 밟기 어려워진 까닭이다. 

빛바랜 ‘대영톱집’ 현수막이 걸린 집 오른편으로 꼬불꼬불한 망대골목길이 이어진다. 길이 좁고 길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처마가 많아 허리 꼿꼿이 세우고 양반걸음으로 걷다간 어깨나 얼굴에 생채기 꽤나 입는다. 다들 이렇게 살았다. 처마와 처마를 서로 마주대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남루한 세월을 견뎠다. 어느 집 대문의 녹슨 사자 문고리를 만지작댄다. 두드려 낡은 담 너머로 인기척이 들리면 한없이 반가울 텐데. 지나가는 이 없이 어쩌다 개 짖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골목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덧버선을 보며 한참을 서성인다. 허름해져 조금 쓸쓸하지만 정겨운 풍경 속을 떠나고 싶지 않다. 망대는 골목을 오르내리며 먼발치에서만 감상할 수 있다. 일제시대 세워진 화재감시탑은 이제 민방위 사이렌을 울린다. 망대 아래 다닥다닥 붙은 어느 집에선가 조각가 권진규가 고등학교 때까지 하숙을 하고, 화가 박수근이 막노동을 했단다. 

좁은 골목을 빠져 나오면 제법 넓은 삼거리다. 죽림경로당 쪽으로 내려서면 중앙시장 명물 튀김만두를 파는 분식집 골목으로 이어지고, 기대슈퍼 쪽으로 내려가면 다시 약사리고개다.

약사리고개를 넘으면 약사천이 흐른다. 옛날 도심을 흐르던 하천을 복개해 풍물시장이 들어섰으나 얼마 전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조선시대 효자 반희언의 효심을 기린 효자상.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약사천 건너편 한창 건설 중인 아파트 단지와 낡은 기와지붕이 대조를 이룬 곳이 효자동이다. 본래 모두 도시개발이 예정돼 있었는데, 옆 동네에 먼저 아파트가 들어서며 여러 가지 개발의 폐해를 지켜본 효자1동 주민들은 개발 대신 공동체 삶을 선택했다. 효자동은 조선시대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공양한 효자 반희언의 효심이 깃든 마을이다. 효자1동 주민들은 이를 기리기 위해 잿빛 담벼락에 마을의 전설을 담은 벽화를 알록달록 채색하고, 설화 속에 등장하는 산삼과 딸기 등을 그린 우체통을 집집마다 달아 마을의 소식을 나누며 골목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효자1동의 손맛과 인심을 맛볼 수 있는 효자골밥집. 주민 이옥화 씨가 정갈한 음식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밥과 국, 예닐곱 가지 반찬으로 차려진 백반 한 상이 4000원. 2014년 3월 사진 / 주성희 기자

또 주민센터 앞에 마을 주민이 음식을 만들어 파는 ‘효자골밥집’을 내고 판매 수익금으로 홀몸 노인 도시락을 지원하는 등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노력 덕분에 노인만 남은 마을에 젊은이들이 찾아들고 마을은 점점 생기를 되찾고 있다. 주민센터 앞 골목으로 곧장 올라가면 중병에 걸린 노모를 산삼으로 살린 반희언 효자상이 미소 짓고 있다. 효자상 아래에는 태권 V 정승, 정크 로봇, 개구리 벽화로  새 문화의 향기를 더한 옛 골목길이 핏줄처럼 효자동 사람들을 가닥가닥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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