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함양] 섬진강과 가장 근접한 지리산 둘레길 가탄~송정 구간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길이다. 둘레길이지만 산길이 주가 되어 두 개의 고개를 넘는다. 벚꽃십리길 법하마을과 녹차밭, 산나물, 지리산 능선을 조망하는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우리의 오래된 현재, 법하마을
법하마을의 집들은 대개 낮은 슬레이트 지붕에 창호지가 발린 옛 문이 달려 있다. 대문도 오래된 철문이 있는가 하면 고택의 솟을대문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도 왕왕 보인다. 한 100년쯤 되어 보이는 오래된 나무 대문이다. 우리나라의 근대생활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법하마을은 우리의 옛 모습을 고대로 담고 있다.
마을 언덕을 오르니 길은 곧장 지리산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야생 녹차로 유명한 하동의 이름값이라도 하는 듯 한겨울에도 녹차 밭은 초록빛을 자랑하고 있다. 녹차 밭 위로 야생 머위가 군락을 이루고 우산나물, 취나물, 망개나무, 둥글레 등 산나물 천지다. 봄, 여름철 주민들의 식탁은 그것들로 인해 매일 매일이 풍요로울 것이다.
작은재를 넘어가는 길은 둘레꾼의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한다. 황장산 촛대봉에서 내리뻗은 능선으로 연결된 둘레길은 작은재로 하여금 하동과 구례를 잇는다. 작은재를 넘으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간다. 능선 위로 오르니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의 자태가 순식간에 드러난다. 오른쪽에서 시작된 왕시루봉 능선이 오른편 섬진강 쪽으로 길게 뻗어내려 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400m가 채 안 되는 고도에서도 이 같은 장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니. 지리산 둘레길이니 가능하지 않을까.
기촌마을과 은어마을의 어제와 오늘
작은재 사면을 따라 능선을 넘어서니 피아골에서 뻗어 나온 외곡천을 사이에 두고 기촌마을과 은어마을이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다. 기촌마을은 약 270년 전 행주 기 씨가 처음 터를 잡아 정착했다 하여 기씨촌이라 했는데 기씨가 다른 곳으로 이거를 하고 다른 성씨가 입주하면서 기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은 19번 국도에서 피아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마을 앞 자연 송림은 본래 마을 주민의 피서지였지만 관광지화 되면서 외지인이 많아졌다. 섬진강과 합류하는 외곡천은 여름철 피서객으로 성시를 이룬다. 피서객을 수용할 수 있는 펜션단지로 새롭게 등장한 마을이 바로 기촌마을 맞은편에 들어선 은어마을이다. 약 4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 사람들은 문종이(한지)를 만들어 생활했지만 지금은 이렇듯 민박과 한봉, 밤나무가 주수입원이란다. 산줄기에서 기촌마을과 은어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세월에 변해가는 마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어마을로 넘어가는 다리인 추동교를 건너다보면 왼쪽으로 솔섬이 하나 보인다. 원래는 산이었는데 옛날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하천으로 변한 산 가운데 섬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큰 홍수였길래 산이 작은 섬으로 변했을까. 넓은 하천을 보니 그날의 물살 세기와 압력이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은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는 솔섬은 기촌마을에서 나무 데크를 놓아 방문객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했다. 이곳에서 둘레꾼들은 가져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따끈한 차도 마시며 편안한 쉼을 가진다.
추동교를 넘으면 은어마을이다. 원래는 그 자리에 추동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민들이 거의 도시로 떠나고 겨우 네 가구만 남았다. KBS 교양 프로그램 <인간극장>에 나온 ‘지리산 두 할머니의 약속’의 주인공 할머니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56년간 동서지간으로 윗집 아랫집에 살며 서로 의지하고 챙기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기에, 마을을 지나며 혹시나 할머니들을 뵐 수 있을까 하여 기웃거려본다. 낮은 담장 너머로 소박한 집이 자리하고 있다. 옛 시골집처럼 황토벽의 초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모습에 아련한 향수가 묻어난다.
고갯길의 오아시스, 섬진강
다시 산을 오른다. 가탄~송정 구간은 작은재, 목아재 두 개의 고개를 넘는다. 작은재를 넘었으니 이제 목아재만 남았다. 목아재로 가는 길은 산길 오르막의 연속이다. 급하게 움직이기보다는 천천히 한 걸음씩 호흡조절을 잘해가며 움직이기로 한다.
계속되는 오르막 끝에 목아재에 닿는다. 목아재는 섬진강에서 피아골로 넘어가는 옛 고갯길이자 왕시루봉 하산길 중 하나이다. 옛적에는 구례에서 화개로 통하는 큰길로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물교환을 했단다. 목아재에서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진행방향으로 직진하면 송정마을, 되돌아가면 기촌마을, 오른쪽으로 가면 당재로 갈 수 있다. 목아재는 지리산 둘레길 목아재~당재 구간의 시작점이자 가탄~송정 구간의 중간기착지인 셈이다.
목아재에서 출발한 길은 왕시루봉 주능선인 봉애산 정상 아래까지 닿았다가 금세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오르막은 없다. 송정마을로 가는 내리막길엔 다시 밤나무가 한밭이다. 이곳은 척박한 산골 오지로 농사를 지을 땅이 마땅찮아 자급자족이 어렵자 정부에서 힘을 실어준 것이 바로 밤나무란다. 덕분에 지금은 밤나무, 한봉, 매실, 고로쇠물 등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밤나무밭 사이 임도를 따라 걷는데 저 앞 작은 오두막에서 누렁이 한 마리가 큰소리로 짖어댄다. 거리가 가까워져 오자 더 크게 짖는데 왠지 그 목소리가 사납지 않다 했더니 이내 달려들어 꼬리를 살랑거리며 애교를 부린다. 지나는 길손이 반가운 시골 개의 정다운 모습이다. 녀석이 길을 먼저 가기 시작한다. 길손을 에스코트할 참이다. 길손의 보폭에 맞게 같이 걷기도 하고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 사람이 보이면 다시 가기도 하면서 둘레꾼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주더니 송정마을이 가까워져 오면서 간다는 인사도 없이 홀연 사라졌다.
토지면 송정리는 토지면 내계와 외계 마을을 합쳐 새로 지은 이름인데 소나무 정자가 있어 소정, 솔정이라고도 불렀다. 송정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금령 김씨가 피난을 내려와 자리를 잡은 곳으로 1800년경 창녕 성씨가 입주하면서 큰 마을이 되었다. 최종 목적지인 송정마을이라 쓰인 둘레길 표지목 옆에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마을 앞산과 바위가 허옇게 드러난 한수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INFO.
지리산 둘레길 제15코스 가탄~송정 구간
코스 가탄마을-법하마을-작은재-기촌마을-은어마을-추동마을-목아재-송정마을
거리 11.3km
소요 시간 6시간 30분
Tip.
지리산 둘레길 가탄~송정 구간은 준산행 코스다. 가는 도중 식당이 없으므로 반드시 간단한 도시락과 충분한 물을 챙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