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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14] 영웅은 별과 함께 낙성대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14] 영웅은 별과 함께 낙성대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4.0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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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예로부터 큰 인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의 별이 떨어지거나 땅에서 천마가 솟구쳐 올랐다. 고려 시대의 어느 날 이곳에 별이 떨어졌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 태어났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이 서울 하늘 아래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은 서울대입구역 바로 옆이다. 그래서일까? 한때 많은 이들이 낙성대를 대학으로 알았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낙성대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생가 터다. 장군의 어머니가 북두칠성 중 하나인 문곡성이 품 안으로 떨어지는 태몽을 꾸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 중에도 실제로 낙성대를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여기에는 낙성대의 애매한 위치도 한몫 했다. 서울대가 서울대입구역에서 3km 가까이 떨어져 있듯이, 낙성대 또한 낙성대역에서 걷기에 부담스러운 정도로 떨어져 있다. 낙성대역에 내린 김에 잠깐 둘러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이다. 거기다 낙성대 앞길은 서울대로 올라가는 외길뿐이다. 몇 년 동안 이 길로 학교를 다니는 서울대생들도 낙성대를 한 번도 안 가는 마당에 다른 사람들이 낙성대를 방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리도 꽁꽁 숨어 있는 낙성대에는 무엇이 있을까?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문관 출신의 작은 거인
낙성대에 가려면 지하철 낙성대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 마을버스를 타고 낙성대역 바로 다음 정거장인 낙성대입구에서 내리면 다시 3정거장쯤을 걸어야 한다. 낙성대 바로 앞 버스정류장 ‘낙성대공원’에서 내려라. 이곳에서 버스를 내리면 말을 타고 긴 칼을 휘두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릴 적 읽은 위인전에서 강감찬 장군은 작고 볼품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낙성대 동상의 강감찬 장군은 정말로 장군이다. 칼 한 번 휘두르면 적군이 우수수 나가떨어질 것 같은.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후대에 그려진 강감찬 장군의 초상. 사실 강감찬 장군은 왜소한 체격이었다고 한다.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낙성대공원 안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 안국사.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사실 강감찬 장군은 왜소했을 뿐 아니라 문신이었다. 아니, 장군이 문신이라니? 이건 그 옛날 국사 시간을 기억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다. ‘무신의 난’이라는 단어가 기억나시는지? 문신들의 천대를 견디지 못한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도륙했던 사건 말이다. 고려의 무신들은 푸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출세 길도 막혀 있었다. 무신의 난 이전에 고려의 전쟁을 보면 총사령관이 대부분 문신이었다. 강감찬 장군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장군 강감찬이 유약한 문신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한번 입을 열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거란의 명장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군대를 다양한 작전으로 섬멸했던 그다. 당시 거란의 군대는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이런 강군을 맞아 강감찬 장군은 처음에 청야전술로 맞섰다. 방어력을 개경에 집중하고 그곳까지의 길에 쌀 한 톨 남기지 않았다. 굶주리고 지친 거란군은 개경을 제대로 공격해보지도 못하고 물러났고, 후퇴하는 적을 귀주에서 기다린 강감찬 장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낙성대의 동상은 이러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낙성대공원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은 원래 낙성대 자리에서 옮겨왔다.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안국사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2014년 3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낙성대와 10월 유신
장군의 동상 앞에는 제법 널찍한 마당이 있다. 마당 한켠에는 ‘낙성대공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낙성대의 현재 명칭이다. 공원 안에 강감찬 장군 동상과 사당인 안국사가 있다. 제법 큰 규모의 안국사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974년이다. 1973년부터 낙성대 일대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는데, 이는 10월 유신 이후 딱 1년 만의 일이다. 이 무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와 한산도 유적지도 새 단장을 했다. 고려 시대 무신들에게 질시의 대상이었던 ‘문신 출신 대장군’이 대한민국의 군인 대통령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나 보다. 

안국사 안에는 오래된 삼층석탑과 새 것 티가 나는 사적비가 마주 보고 있다. 이 삼층석탑은 원래 낙성대터에 있던 고려 시대 석탑을 옮겨온 것이란다. 응? 낙성대터라고? 사실 대대로 전해오던 낙성대터는 이곳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그곳 주변에는 이미 집들이 들어선 터라, 폼 나는 사당을 이곳에 짓고 아예 석탑도 이사시킨 것이다. 진짜 낙성대터에는 따로 표지석을 두었다니 그리 아쉬울 것은 없다. 이 석탑 덕분에 지은 지 수십 년에 불과한 사당도 제법 옛 분위기가 나는 듯하다. 널찍한 공간에 고즈넉한 분위기. 천 년쯤 전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은 지금 후손들에게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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