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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 따라 삼천리] 할머니는 글을 쓰고, 나는 단잠 자고 전남 함평 산내리
[전설 따라 삼천리] 할머니는 글을 쓰고, 나는 단잠 자고 전남 함평 산내리
  • 전설 기자
  • 승인 2014.03.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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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함평]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을 갈쳐주션넌대도 머리가 나뿐건지 일기를 써노코보면 말리 안대는 말리 써져요.” 일흔일곱 정정옥 할머니의 일기다. “끄벅끄벅 절했서요. 코끼리씨요. 참 잘해서요. 다썼사람 누어 잇는대 코끼리가 발로 잘근잘근 보바주었어요.” 여든 셋의 김현순 할머니는 제주도 여행길에서 만났던 코끼리의 재롱이 참 기특했나보다. 산내리 할머니들이 한글 공부를 시작한지 2년. 조금 서툴고 많이 따뜻한 일기를 읽는다. 왠지 모르게 행복해지는 기분. 빵긋, 웃음이 터진다.


늦게 배운 한글 공부에 폭 빠져 산다는 ‘산내리 학당’ 할머니들을 뵈러 가는 길. 꼬불꼬불 길을 한참 달리던 버스가 전남 함양군 해보면 산내리에 멈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봄 내음이 물씬. 서울에선 쌀쌀맞던 꽃샘추위가 남도에서 만큼은 한없이 너그럽다. 모내기를 앞둔 논두렁에는 우렁이가 뱉어놓은 물거품이 보글보글, 둑길 위에는 푸른 약쑥이 촘촘하다.

논길을 가로질러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는 자꾸 걸음이 방방 뜬다. 내 할머니가 거기 계실리 없는데 “할머니~할머니~” 하고 넉살좋게 매달려 잔뜩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 허파에 봄바람이라도 들었나? 들뜬 기분이 싫지만은 않아 마을 입구까지 단숨에 뛰어간다.

산내리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는 마을에 닥치는 흉사를 막는다는 ‘선돌할매’였다. 짚옷을 걸치고 있는 돌할매 맞은편에는 철사와 스테인리스로 만든 산내리 당산나무가 서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는 산내리의 당산나무를 재현한 이기성, 최은태 작가의 작품이다. 영험한 돌할매와 최신식 당산나무가 부부처럼 썩 잘 어울린다. 뒤편으로 누에?한과단지가 보인다. 건물 외벽에 수년 전 마을을 다녀간 MBC <무한도전> 멤버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화단 바위에 꽃무릇, 여치, 나비, 무당벌레 그림이 아기자기하다. 전봇대에 그려진 화살표를 이정표 삼아 마을 안쪽으로 들어선다.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최은태 작가가 새롭게 디자인한 쓰레기통에서 기념 촬영 중인 산내리 할머니들.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알록달록 예술꽃이 피었습니다
낮은 담벼락마다 유명 벽화마을 부럽지 않은 그림이 빼곡하다. 집집마다 나비가 날고 돌고래가 헤엄친다. 30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산골마을에 무슨 구경거리가 이리 많을까. 

“작년에 근처를 지나다가 미술관 표지판이 보이기에 따라 들어와봤죠. 농촌에 무슨 미술관이 다 있나 했는데 그 덕에 시골구경도 하고 전시회도 둘러보니 재미있더군요. 오늘도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가 그사이 또 어떻게 변했을까 싶어 들렀어요.”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산내리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아낸 재미난 벽화.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산내리에 2번째 찾아들었다는 이기수 씨가 호기심을 풀 단서를 준다. 마을이라기보단 동네에 가까운 조그마한 산골마을이 유명세를 탄 것은 ‘잠월 미술관’ 덕분이다. 김광옥, 임혜숙 미술교사 부부가 8년 전 마을 뒷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난 다음부터 마을을 빛내는 자랑거리가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을을 환하게 장식하는 벽화도 그중 하나.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는 부부의 큰아들과 친구들의 작품이란다. 화투놀이에 빠진 마을 어르신들의 일상을 참 재미나게 그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만나야할 벽화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나들이라도 가셨나. 동네 어귀를 한참 서성이다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김삼순 할머니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달려드니 “아이고. 귀찮아 못써. 심심하며 나말고 저 짝에 마을회관 가봐. 우리 어머님도 거기 가 계시니께” 하며 손사레를 치신다.

김 할머니가 짚어준 길을 내려가니 제일 처음 만났던 선돌할매가 있는 바로 그 자리다. 오호라, 어디에들 숨어 계신가 했더니 마을회관이었구나. 그런데 아무도 들어가도 되나?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산내리 사랑방인 ‘원산경로당’의 오후.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쉬는 시간, 산내리 학당의 풍경

한참을 기웃거리다 슬쩍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뿔싸, 할머니들의 낮잠 시간이었나 보다. 부스스 잠에서 깬 할머니가 “누구네 딸래미야?” 물어 오신다.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찬데 앉지 말고 언능 이리 당겨 앉어. 몸 녹이고 가. 우린 밥 묵었는데 점심 먹었어? 시장하면 국시 좀 삶아줄까?” 한 번 더 물으신다. 미적거리다간 진짜로 밥상을 다시 펴실 것 같아 밥은 먹고 왔노라, 할머니들 한글 공부한다는 소문 듣고 서울에서 왔노라 서둘러 답한다.

“오늘은 쉬는 날이고 공부는 토요일날 하제. 마을회관이 교실인게 요짝에 다 모여서. 근디 공부도 기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기제 이짝이랑 나랑은 나이 먹어서 하덜 못해. 아무리 가르쳐줘도 돌아서면 또 잊어 묵고 또 물어보고 하니께 선생님도 얼마나 속 답답하겄어.”

산내리에는 최고령 할머니가 두 분 계신다. 무슨 인연인지 함자도 같다. 올해 아흔이 되신 ‘큰’ 김복임 할머니가 뜨끈한 아랫목을 짚어주신다. 그러자 두 살 어린 ‘작은’ 김복임 할머니도 “자꾸 찬 데로 가네. 요짝 뜨신 데 누워. 그래야 몸도 좀 녹제” 하고 거든다.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나비가 날고 돌고래가 헤엄치고 수박이 익어가는 마을 전경.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두 김복임 할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가장 따끈한 자리에 베개를 베고 눕는다. 누운 자리에서 도란도란 말이 오고 간다. 그날 할머니들의 최고 관심사는 말만한 처녀가 왜 아직 시집을 못 갔느냐였다. “시집은 저 혼자가요? 남자가 있어야 가죠.” 샐쭉거리니 “그람 혼자라도 가 있어봐. 누구라도 쫒아 오겠지.” 하신다. 내 인생의 몇 곱절을 사신 할머니들의 입담을 이길 재간이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전국의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왜 마을회관 들러볼 생각을 못했을까. 이렇게 따습고 재미난 곳인걸. 누워서 듣고 있으니 할머니들 담소 나누는 소리가 자장가다. 자면 안 된다, 근무 중이다, 되뇌어도 눈꺼풀이 천근만근. “눈 좀 붙여. 깨워줄텐게.” 하는 소리에 마음을 놓고 까무룩 낮잠에 빠진다.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할머니들의 공부 시간.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차렷, 경례, 선생님께 인사
달게 자다 하마터면 가장 중요한 선생님을 못 만날 뻔했다. 해는 벌써 중천. 벌떡 일어나 잠월미술관으로 향한다. 잠월미술관의 김광옥?임혜숙 부부는 각각 광주 장덕중학교, 산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진짜’ 선생님이다. 평일엔 학교, 토요일엔 학당을 오가며 매일 학생과 만난다. 쉬는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한글 공부 선생님으로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을에서 함께산 지 6년 만에 처음 알았어요. 예전에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촬영할 때 다같이 ‘산내리 파이팅’이라고 쓰자고 했거든요. 근데 할머니 한 분이 ‘우리 글 못써. 까막눈이여’ 하시는 거예요. 누가 머리를 쾅, 하고 때린 느낌이었어요. 그때 ‘할머니 내가 글 가르쳐드릴게요’ 약속한 게 지금의 산내리 학당이 됐지요.”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매주 토요일은 ‘산내리 학당’ 수업날이다. 2014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학당에서는 별명이 곧 이름이다. ‘왕초’ 김현순 할머니가 “차렷, 경례, 선생님께 인사!” 하면 다른 할머니들이 “사랑합니다” 인사를 한다. 얌전이, 억척이, 나들이, 뺑돌이…. 별명만 봐도 성격이 보인다. 유난히 수줍어하시던 ‘얌전이’ 윤영자 할머니는 “공부하는 거 아주 심들어. 근데 재미 있제. 잘 못해서 그렇제. 나이를 묵어서 외우는 데 한참인게….” 하고 자신을 탓하셨다. 미술관 한쪽에 차곡차곡 쌓인 공책에 꾹꾹 눌러쓴 연필 자국, 지우개 자국이 고스란하다. “이름도 모리는 꽃. 종덕이가 꽃 사주어 잘 보고 있다.” 윤 할머니의 그림과 글에 한동안 눈길이 머문다. 할머니는 정말 모르나 보다. 이렇게 툭, 툭, 던지는 한두 마디가 보는 가슴을 찌르르 울린다는 것을.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큰일인가를.

“한마디 한마디가 시예요. 언젠가 우리 할머니들 글 엮어서 시집도 내고 싶어요.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러려면 더 힘내서 수업해야지요. 몸이 조금 고단하긴 하지만 약속했거든요. 할머님들 소풍 끝나는 날까지 수업하자고.”

산내리 학당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한 구절처럼 할머니들이 소풍을 끝내고 돌아가는 날까지 계속된다. 그 사이, 산내리에 사는 할머니 열 분의 이야기를 담은 도톰한 시집 한 권이 완성되길 소원해 본다. 분명 따스한 봄날 읽기 좋은 포근한 시집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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