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경남]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다는 남원 인월에서 광천 둑을 따라 걷다 옛 마을을 거쳐 소나무 숲으로 접어들었다. 맑은 물과 연초록 향기를 뿜어내는 소나무 숲에서 봄기운을 만났다.
달오름마을에서 중군마을 가는 길
“마산에서 빵 장사를 했는데 지리산 놀러왔다가 반해서 이곳에 놀러 앉았어요. 당시 비염으로 고생을 하던 터라 공기 좋은 데서 살자고 마음을 굳혔죠. 밀가루는 호주산, 팥은 국산, 인월막걸리로 반죽을 합니다. 단골손님도 많고 서울이나 부산서 택배로 시켜가는 분들도 있지요.”
찐빵을 사서 배낭에 넣고 달오름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월교를 지나 산내면 방면으로 하천을 따라 걷는다. 오른쪽이 달오름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군과 황산벌싸움을 벌일 때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군은 불리한 전황을 이기기 위해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고 기도를 했다. “어둠과 안개 속에 묻혀 있던 달님이여! 잠깐만 얼굴을 비춰 주소서!” 그러자 인풍마을에서 바람이 불어와 안개를 걷어내 달을 떠오르게 했고, 그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단다. 달오름마을에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여행객이 많아 민박집도 많다.
둑방길로 1.5km를 걸어가자 중군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근사한 기와집과 누각이 세워지고 있다. 둘레꾼과 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쉼터 겸 체험장을 짓고 있는 중이란다. 마을 앞에는 중군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인월과 산내면으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둘레길은 마을 왼쪽 길로 가야 한다. 담벼락에 재미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길로 가도 왼쪽으로 치우쳐서 나아가면 둘레길과 만난다. 이 길에는 수십 년 된 옛날 돌담과 구부렁길인 고삿길을 마주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숨어 있었다는 유서 깊은 중군마을에는 4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중군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건너편 산에 빨간 껍질을 한 소나무들이 파릇한 기운을 내뿜는다. 겨우내 몸을 움츠린 채 검푸른 색을 띄고 있던 소나무 잎이 연초록 옷을 갈아입으려고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노란 매화꽃이 핀다는 황매암
황매암과 백련사로 갈라지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가면 백련사가 있는 내리막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황매암이 있는 오르막길이다. 황매암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노란매화꽃이 많이 피어서 황매암이라 불리는 작은 암자. 그 이름을 증명할 매화는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았다. 2004년에 일장 스님이 지었다는데 시야가 탁 트여 전망이 좋다. 대웅전 아래 마당에는 석천(石泉)이라는 샘이 있다. 어느 돌 틈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으나 물맛이 보드랍고 달콤하다.
황매암을 돌아나와 가던 길로 계속 직진하면 소나무 숲길이다. 숲에서 날렵한 바람이 날아와 이마를 훔친다. 산길을 1.5km 정도 가자 수성대라는 계곡이 나온다. 물이 맑다. 수량이 많지 않지만 물이 흘러가며 내지르는 졸졸졸 소리가 듣기 좋다. 산마루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줄기는 아랫마을 사람들의 생명수가 된다.
수성대에서 배너미재를 지나 산길을 벗어나니 건너편에 민가들이 보이고, 저 멀리 하얀 눈이 덮인 천왕봉과 지리산 주능선이 시야에 가득 찬다. 산비탈에는 더 거친 바람이 분다. 바람결에 말라비틀어진 고사리들이 스삭스삭 마른 울음을 운다. 고사리밭둑에 주인이 세워놓은 팻말이 여행객의 눈길을 끈다. 카메라가 보고 있으니 농작물에 손대지 마세요, 둘레길을 거닐며 자주 마주하는 글귀다. 둘레길이 생기면서 과실이나 농작물을 잃어버리는 농부들이 심심찮다고 한다. 거의 모든 농작물은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농부의 생명줄이다. ‘나 하나쯤, 겨우 하나 따는데 뭐 어때’ 라는 생각이 모이면 농부의 속이 탄다.
산비탈을 내려가면 노루의 목을 닮았다는 장항마을이 있다. 장항마을에 다다르자 4백 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이 대대손손 제를 지내고 숭배하는 당산나무이다. 당산나무 아래 둘레길 쉼터가 있다. 도토리묵과 파전, 막걸리, 라면 등을 판다는데 겨울이라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주인이 안 보인다. 장항마을에서는 지리산 신선길 1코스가 시작된다. 바래봉까지 12km 거리다. 장항마을을 뒤로 하고 자동차들이 다니는 큰 길로 나온다. 매동마을 뒷길로 가야 한다.
매동마을과 소나무숲길
매동마을은 실상사 도법스님과 지리산생명연대 사람들이 처음 지리산 둘레길를 낸 마을이다. 격렬한 등산보다 심신을 수련하며 걷는 길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둘레길의 시발점이 것이다.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인 민박촌이기도 하다. 제3코스를 시작한 달오름마을도 골목마다 민박집이 있었는데 매동마을도 못지않다.
매동마을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오른다. 10여 분 오르면 서진암 가는 길과 둘레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오솔길로 나아간다. 마주오는 두 사람이 간신히 비켜설 정도로 좁은 숲길은 둘레길이 열린 후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터라 길은 반들반들하다.
20여 분 산길을 걸어가자 확 트인 하늘이 보이고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쉼터 겸 예쁜 펜션이 있다. 마당이 넓고, 누구나 앉아서 쉴 수 있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 등구재는 쉼터 왼쪽으로 가야 한다. 등구재를 넘어서면 경상도 함양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등구재는 경계가 아닌 이음새다. 저 멀리 등구재 고갯마루와 다랭이논이 보인다. 많은 여행객이 벼가 노랗게 익은 다랭이논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며 자랑하는 그 마을이다. 봄을 기다리는 다랭이논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INFO. 지리산 둘레길 제3코스
구간 인월-중군마을-수성대-배너미재-장항마을-서진암 삼거리-상황마을-등구재-창원마을-금계마을
거리 19.3km
소요 시간 8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