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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15] 8개의 홍살문이 지키는 제단 사직단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15] 8개의 홍살문이 지키는 제단 사직단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4.03.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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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 사극에 등장하는 단골 대사이다. 유교 왕국 조선에서 종묘와 사직은 국가 그 자체였다. 종묘는 역대 국왕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 사직은 토지 신과 곡식 신을 가리킨다. 서울 종로의 사직단은 사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그래서 사직단의 중심에는 건물이 아니라 텅 빈 제단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을 처음 보면 ‘이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 분명히 뭔가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야 할 중심에 흙으로 덮인 야트막한 제단만 자리 잡고 있으니. 사방으로 홍살문을 겹으로 두른 것이 무엇인가 대단히 중요한 장소인 것은 같은데, 한복판에는 제단만 덩그러니 보인다. 그것도 두 개가 나란히. 허나 서울 종로의 사직단은 조선 시대부터 이런 모습이었다. 이름 그대로 토지 신인 사(社)와 곡식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사직의 신위를 모신 신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유교국가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주나라의 <예기>에 따르면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지어야 한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도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지었다. 그것도 경복궁보다 먼저. 종묘와 사직단은 궁궐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상을 하늘처럼 모시는 유교에서 왕보다 왕의 조상이 더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 땅과 곡식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이룰 수 있으니, 토지 신과 곡식 신이 중요한 이유도 자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장소인 종묘와 사직에 직접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진 반면, 사직단은 여전히 한적한 장소로 남아 있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가운데가 신위가 들어오는 신로, 왼쪽이 왕이 다니는 어로, 오른쪽이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왕보다 사직, 사직보다 백성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쉬엄쉬엄 걸어도 5분이면 사직단에 도착한다. 제법 큰 솟을대문 현판에는 ‘사직단(社稷壇)’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정문을 지나면 야트막한 담장 사방에 홍살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또 하나의 담장이 있고, 거기도 역시 사방에 홍살문을 두었다. 왕릉에도 하나만 세우는 홍살문이 8개라니, 이곳이 얼마나 신성한 장소인가를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북쪽 바깥의 홍살문인 북신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다. 사람이 다니는 문은 남쪽이지만, 신은 북쪽에 난 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평소에 북신문은 닫혀 있지만, 관리사무소에 이야기를 하고 이름만 적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사직단에는 동서남북으로 2개씩, 모두 8개의 홍살문이 있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왕이 절을 하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판위가 신로를 막고 있는 것은 복원이 잘못된 것이다.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북신문 뒤로는 벽돌로 북돋운 길이 이어진다. 가운데는 신위가 들어오는 신로, 왼쪽과 오른쪽은 왕과 세자가 다니는 어로다. 왕과 세자도 사직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는 이야기. 맹자는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사직이 다음, 왕이 가장 마지막”이라고 했다. 신로 중간에 벽돌을 깔아 만든 정사각형의 공간이 눈에 띈다.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왕이 절을 하는 판위다. 그런데 사실 판위는 신로 중간에 있으면 안 된다. 신이 가는 길을 인간이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판위가 있는 까닭은? 아쉽게도 복원이 잘못된 것이다. 사실 사직단 정문의 위치도 지금보다 10여m 앞에 있었단다. 1960년대 도시 계획 과정에서 길을 내기 위해 뒤로 물린 것이라고.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사직단의 정문. 2014년 4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창경궁은 창경원,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사직단이 훼손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종묘와 함께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던 사직단은 이미 일본에 의해 두 번이나 훼손되었다. 최초의 훼손은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지 20일이 안 되어 한양까지 점령한 일본은 사직단의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 유교국가의 사직단을 없앤다는 것은 나라를 없애는 일과 같다. 토지 신과 곡식 신의 신위를 피난 가는 왕이 챙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지만 이는 백성을 버리고 사직만 챙긴 것이니 맹자의 눈으로 본다면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임진왜란 후 복원된 사직단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수난을 겪는다. 이번에는 사직단의 격을 낮춰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사직단의 시설을 훼손하면서 이름도 ‘사직공원’으로 바꾼 것. 마치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것처럼. 사직단은 해방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사직공원이었다가, 이후 도시 계획을 거치며 규모가 더욱 줄었다. 다행히 1980년대 말에 일부 복원되었으나, 아직 본래 모습을 모두 회복하진 못한 상태다. 

두 개의 홍살문을 지나면 드디어 두 개의 제단과 만난다. 왼쪽이 사단, 오른쪽이 직단이다. 벽돌로 만들어 올린 기단 위에는 흙이 덮여 있다. 언뜻 누런 황토로만 보이지만 동서남북과 가운데 모두 다른 색깔의 흙을 깔았단다. 사직단 정문에서 여기까지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 잡아 15분. 광화문을 지날 때 잠시 짬을 내어 사직단에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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