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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 따라 삼천리] 봇뜰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남양주시 가양주 양조장 봇뜰
[전설 따라 삼천리] 봇뜰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남양주시 가양주 양조장 봇뜰
  • 전설 기자
  • 승인 2014.06.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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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남양주] ‘한 마을에 술독이 열이면 술맛은 스물’이라는 말이 있다. 한 논에서 거둔 쌀을 1말씩 나누고 같은 우물물로 술을 빚어도 아래윗집 저마다 다른 맛이 나는 우리네 가양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집집마다 술 익는 냄새 그득했던 한때를 그리며 시조 한 수를 읊어본다. “자네 집 술 익거든 부디 나를 부르시소. 우리 집 초당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 옴세.”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발뒤꿈치로 디뎌 만든 전통 누룩.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가양주는 어머니가 딸에게, 또 며느리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던 ‘물로 빚은 가보’다. 쑥, 솔잎, 도토리 등등 집집마다 맛과 향을 더하는 비법 재료가 다르고 술 거르는 손이 다르고 담는 독이 달으니 그만큼 맛, 빛깔, 향의 가짓수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뿌리 깊은 술 역사는 일제 침탈 이후 ‘가양주 말살 정책’으로 두 동강이 나고 만다.


“1907년 일제가 주세령을 공포합니다. 면허가 있는 사람만 술을 담을 수 있게 자격을 제한하죠. 말이 좋아 면허지, 집집마다 밥해 먹듯 쉬이 술을 담가 먹던 이들이 더 이상 술을 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전통주 말살 정책이었죠. 장검을 찬 순사가 집 밖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시로선 술을 담근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못할 범법 행위가 된 겁니다.”

대한민국 술 박사 1호로 불리는 정헌배 중앙대학교 교수는 말한다. 상고시대 때부터 술을 즐겼던 우리 민족은 그렇게 술잔을 뺏기고 화학 소주와 수입 맥주에 길들여지게 됐노라고.

집집마다 술 익는 냄새 그윽하게 감돌던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렇다고 가양주의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전국에는 발로 누룩 디디고 손으로 고두밥 얼러 술을 빚는 양조장과 가양주 장인들이 여럿 있다. 그중 술맛 좋다는 소문이 담을 넘은 가양주 양조장 ‘봇뜰’로 술 한 잔 걸치러 나선다.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고두밥은 열기를 충분히 식힌 뒤 술독에 넣는다.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수을 수을’ 넘어가는 진짜 술맛
철마산을 마주한 경기도 남양주시의 작은 마을을 가로지른다. 그 길 끝에 아담한 2층 집이 보인다. 상호도 간판도 없지만 마당에 그득한 술 냄새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아챈다.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지금 덧술할 고두밥 식히고 있으니까 조금 기다려요. 그나저나 날이 너무 뜨거워서 술 시어질까봐 걱정이네요. 우리 술은 날씨를 많이 타거든요.”

너른 발에 펼쳐둔 고두밥은 참기름을 발라놓은 양 윤기가 반지르르. 맛 좀 보라며 한 줌 쥐어준 고두밥을 우물우물 씹는다. 찹쌀 알갱이가 꼬들꼬들 씹히는 게 참 맛도 좋다. 미지근한 고두밥을 마저 식히는 사이, 권옥련 대표가 술 한 병과 ‘떠먹는 요구르트’를 내온다.

“술 잘 해요? 6개월 전에 담근 십칠주인데 들어봐요. 보통 막걸리 도수가 6~7%인데 얘는  17%예요. 보통 막걸리에 3배는 되죠. 얘는 이화주, 수저로 떠먹는 탁주 알죠? 이것도 12% 정도 되요. 보기에는 이래도 꽤 세니까 천천히 맛 봐요. 고두밥으로 안주 해가면서.”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떠먹는 탁주 이화주.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시중에 파는 떠먹는 요구르트와 똑같이 생겼는데 술이라니? 어리둥절해 요구르트를 먹을 때처럼 뚜껑부터 핥아 본다. 시큼한 첫맛 뒤에 바짝 따라붙는 얼얼한 술맛이 신기할 따름이다. 플라스틱 수저로 폭 떠먹으니 그제야 묵직한 탁주의 맛이 입안에 확 번진다. 생각보다 강한 술맛에 코를 찡끗, 했다가 곧이어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의 여운에 얼굴이 활짝 핀다. 너무 맛있어요, 가감 없는 솔직한 평에 권 대표의 얼굴에도 뿌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다음은 십칠주 차례. 막사발이 아닌 유리잔에 술을 받는데 지금껏 봐온 뽀얀 막걸리와는 때깔이 조금 다르다. 가뭇가뭇하고 누리끼리한 빛이 술이 아니라 곡물을 곱게 갈아 만든 미숫가루 같다. 술잔을 들고 호로록 들이켠다. 풋과일을 한입 덥석 깨물었을 때의 달고 떫은 신맛이 혀에서 코끝까지 퍼진다. 혀가 느낄 수 있는 맛 중 즐거운 것만 골라내 한데 섞은 것 같은 이 오묘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표현할 말을 찾고 있는데 권 대표가 선수를 친다. “맛있죠?”

오직 누룩과 쌀과 물
홀짝홀짝 술잔을 비우다 문득 궁금하다. 혀에 착착 감기는 이 술,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지?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라도 있으려나? 이참에 배워가서 술 한번 빚어 볼까? 

“술을 빚을 때 제일 중요한건 누룩이에요. 누가 시장에서 파는 누룩으로 술 담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누룩은 꼭 직접 디뎌보라고 말하죠. 다들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아니거든요. 통밀을 빻고 물에 적셔서 반죽한 다음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1시간 정도 디디면 돼요. 사람이 할 일은 그게 다예요. 그 다음부터는 야생 효모와 효소가 누룩을 만들어 주죠.”

봇뜰의 술은 ‘삼양주’다. 밑술, 덧술, 2차 덧술을 가지고 3번을 빚는다.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쌀 범벅을 만들고 발효된 누룩을 넣으면 밑술이 된다. 밑술을 술독에서 이틀간 숙성시키고 다시 한 번 덧술을 더한다. 덧술을 만드는 방법도 밑술과 똑같다. 쌀 범벅에 누룩을 넣고 뒤적뒤적 섞으면 끝. 그 다음엔 술독 안에서 술을 만들어내는 일꾼을 위한 새참을 만들 차례. 3시간 정도 불린 찹쌀을 쪄서 고두밥을 만들어 술독에 넣어 주는데, 효모가 이 밥을 배불리 먹고 알코올을 배양해 도수를 높인다고. 마침 발에 널어둔 고두밥이 적당히 식었다. 권 대표가 고두밥을 거둬 배양실로 들어간다. “고두밥은 이렇게 한 알 한 알 붙지 않게 풀어줘야 해요. 그래야 효모들이 먹기 편하지. 그 옆에는 먼저 담아 둔 술인데 지금 보글보글 끓죠. 요기 끓은 자국 보면 여기까지 끓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는 거예요. 얘네가 다 살아있다는 증거죠.” 술 끓는 것 좀 들여다보려고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훅 올라오는 술 냄새에 정신이 알딸딸해진다. 눈이 스륵 감기면서 취기가 오른다.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고두밥은 이렇게 한 알 한 알 풀어줘야 해요. 그래야 효모들이 먹기 편하지.”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술 빚는 엄마, 엄마의 술
“엄마가 술 빚는 걸 보고 컸어요. 엄마가 ‘이거 가 온나, 저거 가 온나’ 할 때마다 심부름 하면서 자연스럽게 술 빚는 법을 몸으로 배웠죠. 우리가 8남매거든요. 다들 시집 장가간 뒤에 얼마나 경사가 많아요. 엄마가 그런 잔칫날 맞춰서 꼭 술을 빚었거든요. 손녀딸 백일 때는 백일주, 돌 때는 돌주 빚으며 ‘소주 먹으면 속 버린다. 내 술 묵으라’ 하시면서요.”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권옥련 대표의 벗들은 전화할 때마다 “안주 하게 고두밥 챙겨오라” 청한다고.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십칠주, 이화주, 송순주, 두견주, 국화주 등등 술 익는 냄새 가득한 발효실.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자그마한 2층 건물 ‘봇뜰’이 산 뒤꿈치에 자리 잡고 있다. 2014년 7월 사진 / 전설 기자

권옥련 대표는 안동권씨 집안의 며느리였던 어머니로부터 솔잎과 국화꽃을 활용한 ‘순화주’를 비롯한 집안의 가양주 제조 비법을 물려받았다. 여기에 본격적인 솜씨를 더해 지난 2008년 ‘전국 국(麴)선생 선발대회’에서 가양주 장인에 선정되는 영광을 않기도 했지만, 사실 이보다 위대한 유산은 따로 있다. 바로 술을 대하는 마음가짐.

“술 장사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욕심 부려서는 이렇게 술 못 담그죠. 제가 생각하는 술 빚는 기쁨은 이런 거예요. 예전에 한 막걸리 축제에 참가했을 때 맛이나 좀 보시라고 집에서 담근 술 다 들고 나와서 시음행사를 했어요. 근데 남편이 갑자기 ‘저 할아버지 봤어?’ 그래요. 한 할아버지가 술을 조금씩 따라 드리니까 더 달라는 말을 못하고 행사장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두 번, 세 번 찾아오신 거예요. 그 마음이 감사해 막걸리 두어 병 챙겨다 드리는데 고맙고 미안하다고, 옛날 어릴 적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그 술맛이랑 똑같아서 그랬다고 사과를 하시더군요. 제게는 그만한 칭찬이 없었는데 말이죠.”

술 빚는 엄마를 보고 큰 딸. 그가 빚은 술에서 옛 어머니의 술맛을 본 아들. 술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딸과 아들 사이엔 분명 무척 달큼한 술 익는 냄새가 감돌았으리라. 오래 전 한때, 술 익는 마을에서 풍기던 바로 그 향기 말이다.

Tip. 봇뜰 여행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로 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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