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서울] 본래 이름은 효창원이었다. 일제에 의해 효창공원이 되었다가 해방 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독립투사들의 묘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들의 묘역을 이곳으로 모신 김구 또한 여기에 묻혔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곳을 운동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역사는 숨겨졌고, 이제는 찾는 이 드문 사적지가 되어버렸다.
이곳은 ‘숨겨진’ 문화유산이다. 1956년 대통령 이승만이 이곳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고 운동장을 건립한다고 발표했을 때,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이승만은 무덤들을 그대로 둔 채 운동장을 세웠다. 그 뒤를 이은 박정희 또한 이곳에 골프장을 지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이곳에 반공투사 위령탑과 노인회관을 세웠다.
독재자가 없애고 싶어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곳, 생뚱맞은 시설들을 세워서 이곳에 담긴 역사를 가린 곳. 1989년에야 사적 제330호로 지정된 효창공원이다. 이곳에는 김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묘소와 백범김구기념관이 효창운동장과 함께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수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효창공원이 간직한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독재자들의 의도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죽어서 바뀐 라이벌의 운명
김구가 세상을 뜬 뒤에는 이승만의 단독 질주가 이어졌다. 이승만은 국부가 되었고, 그의 생일은 국경일이 되었으며, 김일성의 동상만큼이나 거대한 동상이 남산에 세워졌다. 수십 년에 걸친 이승만과 김구의 라이벌전은 이승만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듯이 보였다. 승리의 절정에서 라이벌의 무덤을 파버리려고 한 것은,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아직도 불안했기 때문이었을까? 만일 후자였다면, 이승만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불과 몇 년이 지난 후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이후로 그 차이는 점점 벌어져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제 김구는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 0순위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승만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극우보수로 불리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고, 당분간, 아니 앞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재역전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우리 현대사처럼 굴곡진 공간
효창공원의 정문인 ‘창렬문(彰烈門)’은 보통 사당의 정문 양식인 외삼문이다. 여느 공원과는 대문부터가 사뭇 다르다. 그 안쪽으로는 송림이 옛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와 그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었던 곳이다. 그러니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했던 것이다. 이들의 무덤을 강제로 이장하고 여기를 공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일제였다. 조선 왕실과 관련된 장소들을 공원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은 것은 일제의 전략이었다. 경복궁은 전각들을 헐어낸 뒤 박람회장으로 삼았고, 창경궁은 아예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꿨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온 김구는 이곳에 윤봉길과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를 안장했고, 자신이 눈을 감은 후에는 이곳에 안장되었다.
송림을 지나면 삼의사의 묘가 나오고, 다시 오솔길을 지나면 김구의 묘를 볼 수 있다. 그 아래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신 사당 의열사가 있고, 의열사 바깥에는 웅장한 대리석 건물인 백범김구기념관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기념관 맞은편에는 효창운동장이 자리 잡았다. 이승만의 기념비적 운동장과 김구를 기념하는 건물이 지금도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