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동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스런 국도를 꼽으라면 7번 국도를 꼽는 이가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을 등뼈처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7번 국도는 가는 곳마다 절경 아닌 곳이 없고, 수많은 전설과 역사의 숨결을 담고 있다. 푸른 바다와 나란히 달리며 항구마다 정겨운 우리네 어촌 모습 또한 여행객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TV를 비롯해 각종 매스컴에서도 다룰 만큼 7번 국도는 ‘국도계의 스타’다. 아예 7번 국도 여행만을 다룬 책이 서점에서 팔릴 정도니 그 유명세야 더 말하면 무엇하리.
부산에서 시작되는 7번 국도는 경주와 포항, 영덕과 울진을 지나 강릉-속초-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진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 풍부한 먹을거리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아예 7번 국도를 맛 기행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부산에서 강릉까지는 사람들이 꽤 많이 알고 찾는 곳이다. 부산에서 국도 여행을 시작하는 이는 강릉까지 들러 영동고속국도를 타고 일정을 마치고, 이 영동고속국도로 강릉까지 와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많이 잡는다. 때문에 의외로 강릉에서 통일전망대로 오르는 코스는 사람들의 선택 리스트에서 많이 제외되곤 한다. 딱히 유명한 큰 관광지가 다른 곳보다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코스를 다녀본 사람은 안다. 이 길이 동해안의 숨은 보석들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 말이다.
우선 여행의 시작을 강릉 선교장으로 잡았다. <춘향전>과 <궁>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더 유명한 선교장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강원도 최고의 대지주였던 이씨 집안의 정원이다.
‘선교’라는 이름은 배다리라는 뜻인데, 옛날에는 이곳 앞까지 경포호수가 펼쳐져, 배를 대는 다리가 있었던 데서 이름이 붙었단다. 선교장은 18세기 초 지어진 아흔아홉 칸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상류층 가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간인의 전통 가옥치고는 정말 화려하다. 관리가 잘된 까닭이라고 해야 할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세월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툇마루에, 지붕에, 정원의 나무 하나하나에 숨겨두고 있다. 여느 민속마을이나 한옥마을처럼 그저 보존되어 있는 고택이 아니라 아직도 인자한 얼굴을 한 집주인이 손님을 반갑게 맞이할 듯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긴다.
선교장 중앙의 활래정으로 간다. 옛날엔 이 활래정에서 경포호수를 바라봤다고 한다. 또 그 옛날 경포호수가 선교장 앞까지 펼쳐져 있을 때에는 배로 다리를 만들어 선교장을 드나들었다고 하니, 그 시대에 이곳은 신선들의 별장쯤 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활래정을 지나 고택의 툇마루에 앉아본다. 날씨 좋은 날에 툇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저절로눕고 싶어진다. 공공장소에서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카메라를 던져두고 눕는다. 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그늘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졸음까지 밀려온다. 잠시 눈을 붙일까? 안 돼 안 돼! 여기는 네 집이 아니지 않니? 잠은 집에서 자야지.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다시 장내를 둘러본다. 곳곳에 감춰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연인들이 산책하기에 딱 좋다. 다음엔 기필코 애인이랑 꼭 같이 오리라 기약 없는 다짐만 해본다.
강릉을 나와 본격적으로 7번 국도를 달린다. 바다는 잠시 몸을 숨기고 있다. 더운 날씨지만 에어컨 대신 창문을 모두 연다. 저 어디에선가 나란히 달리고 있을 바다의 땀 냄새가 진하게 콧등을 자극한다.
이곳부터는 유명관광지도 좋지만 더 재미있게 여행을 즐기려면 작은 포구를 끼고 도는 해안도로를 달릴 것을 추천한다. 거창하게 말해 해안도로이지 사실 마을을 통과하는 작은 샛길들이다. 가끔은 태양 아래서 열심히 몸을 말리고 있는 미역들 때문에 후진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길인 줄 알고 들어가 막다른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를 때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이것이 바로 7번 국도가 숨겨놓은 보물 중 하나인 것을.
마을 앞에 차를 대놓고 마을을 둘러본다. 몇 걸음만 옮기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작은 마을들이지만 운치만큼은 결코 작지 않다. 미역 말리는 아낙,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할아버지, 낯선 손님이 들어왔건만 누구 하나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는 없다.
“사진 찍으러 왔더래요? 저 짝으로 가믄 희한케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한번 가 보래요.”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말리던 미역 한 줄기를 손으로 끊어 초장에 푹 찍어 먹어보란다. 뭐 먹어보라는 부탁을 거부하는 것은 칠거지악 중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날름 받아 먹는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은 ‘유명관광지’라는 이름을 주는 대신 사람들의 인심을 대가로 가져가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런 곳은 그렇지 않다. 빠듯한 일정상 한 바퀴 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국도로 나온다.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 방금 전 처음 만난 할아버지의 작은 친절에 순간 마음이 찡하다.
드디어 동해와 조우한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애태우다 이제 나타나는 거냐! 하지만 그렇게 애태운 대신 망망한 쪽빛 바다는 선명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한참 동안 산과 바다를 뒤로하며 달리다 보니 낙산사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3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하나이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한 낙산사는 2005년 4월 큰 산불로 전소되어버리다시피 한 비운의 사찰이다. 지금쯤 얼마나 상처가 치유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방향을 바꾼다. 낙산사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기저기 파란 천막과 중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여기저기에선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소리 대신 드릴 소리와 전기톱 소리가 가득하다. 뉴스에서 보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현실 앞에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지금은 그 큰 상처에 딱지가 앉고 있다. 벌거숭이였던 산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고 새로 짓는 건물들도 제법 터를 잡고 있다. 재밌는 것은 낙산사 안의 커피 자판기는 모두 ‘공짜’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점심시간에는 국수도 공짜로 공양한다.
산불 이후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성금으로 낙산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데 대한 자그마한 보답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의외의 행운에 기분 좋게 커피 한 잔씩을 뽑아든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보답하는 마음으로 작은 시주함에 얼마간 시주를 한다.
“우리 사람들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으니 우리가 얼마나 미안해요? 우리가 저질렀으니 우리가 살리는 건 당연하지요.”
한 아주머니의 말에 여기저기서 동의의 표가 던져진다. 그 사람들의 정성이 모아져 어서 빨리 상처에 딱지가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 흉터 없이 아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낙산사를 나와 간성과 거진을 거친다.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다 답답한 마음에 이곳 거진항에서 작은 민박집을 잡아놓고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민박집의 창을 열면 낮에는 푸르름을, 밤에는 시커먼 빛을 내는 동해가 마주서 있었다. 떠나오기 전 한 선배는 동해를 5분 이상 바라보고 있지 말라고 했다.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을 유혹해 바다로 뛰어들게 만든다며, 동해바다만큼 잔인한 유혹이 어디 있겠냐며 신신당부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바다와 나란히 달리며 7번 국도 위에 다시 서 있다. 차 안에서 피식거리며 혼잣말을 한다.
“선배, 동해는 잔인한 바다가 아니야. 잔인하도록 아름다울 뿐이지….”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동해는 여전히 내 오른쪽에서 함께 달리고 있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까지 몇 번을 더 만났다 헤어졌다 하겠지만, 여전히 나에겐 아름다운 ‘그녀’일 뿐이다.
‘그녀’와 그녀가 가진 소중한 보석과 같은 경치를 마음껏 만나게 해준 친절한 주선자, 7번 국도도 이제 서서히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