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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20] ‘독립문의 비밀’을 간직한 주춧돌 영은문 주초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20] ‘독립문의 비밀’을 간직한 주춧돌 영은문 주초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4.08.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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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독립문에는 독립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립문을 만든 서재필의 동상, 그가 이끄는 독립협회의 본부 독립관과 삼일운동선언기념탑, 순국선열기념탑이 더해져 독립공원을 이룬다. 여기에 또 하나, 독립문 앞에는 어엿하게 사적으로 지정된 주춧돌이 있다. 정식 명칭은 ‘영은문 주초’. 독립문의 담긴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커다란 돌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일제는 왜 독립문을 없애지 않았을까?’ 도심을 오가며 마주치는 독립문을 보면서 가끔 들었던 의문이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총과 칼로, 때로는 창씨개명까지 동원하며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꺾고자 노력했던 일제가 왜 ‘조선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그대로 두었던 걸까? 혹시 조선의 상징인 광화문을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던 것처럼 여론의 반대에 굴복했던 것일까? 하지만 일제는 광화문과 달리 독립문은 없애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독립문이 상징했던 독립은 일제의 이익에 부합하는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하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사적이 지금도 독립문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의 이름은 영은문 주초. 대한민국 사적 제33호로 지정된 육중한 화강암 주춧돌이다. 독립문에 가려 눈여겨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돌덩어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일까?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셔놓은 독립관은 원래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이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일제는 독립문을 좋아했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했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이다.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진 사신이 오면 조선의 국왕은 모화관까지 가서 영접하는 것이 상례였단다. 모화관(慕華館)은 ‘중국을 사모하는 집’, 영은문(迎恩門)은 ‘(황제의) 은혜를 영접하는 문’이었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건물이다. 그러니 독립문의 독립은 중국(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래서였을까? 갑신정변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이 12년만인 1896년에 귀국해 독립문을 짓는 것을 일제는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과 일제가 맺은 강화도조약의 내용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간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삼일독립선언기념탑에 있는 삼일운동을 묘사한 부조.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독립문이 지어지기 이전의 영은문 전경.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강화도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이것의 숨은 의미는 그때까지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던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제가 제 마음대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했다. 더구나 1896년이라면 청일전쟁이 끝나고 바로 1년 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은 일본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독립문은 일제강점기 동안 별다른 우여곡절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한때 총독부가 독립문을 없앤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건 근거 없는 뜬소문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일제는 보존상태가 나빠진 독립문을 수리하기도 했다. 물론 3.1운동 이후로는 태극기가 새겨진 독립문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말이다. 일제가 독립문 바로 옆에 서무대형무소를 세운 것도 독립의 기운을 누르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빛과 그림자
주춧돌만 남아 있는 영은문과는 달리, 복원된 건물일망정 모화관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독립문 옆의 독립관의 전신이 바로 모화관이다. 영은문처럼 허무는 대신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관에서 애국토론회를 열고, 자주, 민권, 자강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던 독립협회 회원들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찬성하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반대했을 리 없다. 이들은 청나라와 일본뿐 아니라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영향력이 커졌던 러시아도 반대했다. 또한 그 틈을 노려 각종 이권을 빼갔던 미국과 영국 등 서양제국들의 행동도 비판했다. 하지만 모두의 뜻이 초지일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 독립협회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던 이완용과 윤치호는 일제에게 나라를 판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의 대명사가 되었다. 현재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이완용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협회 회장이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완용이 현판을 쓴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도 이것이 독립문 생존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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