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 따라 삼천리] "이 구역은 건달 할머니들에게 포위됐습니다", 전북 완주 비비정마을
[전설 따라 삼천리] "이 구역은 건달 할머니들에게 포위됐습니다", 전북 완주 비비정마을
  • 전설 기자
  • 승인 2014.08.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여행스케치=완주] 평균 연령 일흔 살의 시골 할머니들이 ‘삐까뻔쩍’ 레스토랑을 차렸다. 자그마한 식당이 아닌 멋스러운 인테리어에 서양식 ‘스테이키’를 썰어야 할 것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 그런데 어라? 테이블 위에는 된장찌개 바글바글 끓는 푸짐한 시골 밥상이 차려진다.


전북 완주 삼례읍의 비비정 마을에는 크고 작은 자랑거리가 여럿 있다. 완산8경 중 하나인 정자 비비정과 그 이름을 딴 농가 레스토랑 비비정, 한식다과카페 비비낙안…. 하나같이 마을을 빛내는 효자들이지만 사실 마을 제일의 명물은 따로 있으니, 바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마을부녀회 할머니들. 하나같이 괄괄한 성격 탓에 붙여진 별명도 ‘건달 시스터즈’다.
어귀에서 만난 어르신이 짚어준 길로 얼마간 걸으니 초록의 볏논 넘어 레스토랑 비비정이 보인다. 음식점이 아니라 미술관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된 외관. 통유리 안쪽을 들여다보니 와글와글 북적북적 만석이다. 괜히 얼쩡거렸다간 혼꾸멍나겠다 싶어 발길을 돌린다. 할머니들과의 면담은 점심시간 이후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 다행히 레스토랑 맞은편에는 등록문화재 221호 완주 구 삼례양수장과 가을자두 ‘추희’ 과수원이 있어 시간 때울 걱정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동네나 한 바퀴 돌아봐야지.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비비정마을의 풍경과 한데 어우러진 비비낙안의 전경.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어제와 내일이 공존하는 마을
붉은 벽돌이 멋스러운 삼례양수장은 1920년 경 삼례와 익산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지어 놓은 근대건축물이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지지는 지금에는 쓸모없는 폐건물이 됐지만, 한때는 두 고장에 밥 지을 물을 퍼 올리며 ‘젖줄’을 대던 때가 있었다. 

“수도 들어오고선 사는 게 참 편해졌어. 그 전에는 뭐 수도가 있었는가. 전깃불도 안 들어왔을 시절인디. 수도 없을 땐 물지게 지고 돌다리 건너서 집까지 연신 물 퍼다 나르는 게 일이었지. 샘이 없어서 고랑물도 먹고 그랬으니께. 그때는 참 너도 나도 심들게 살았지.”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오랫동안 방치된 물탱크를 전망대로 꾸민 뒤 야경을 감상하러 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구경할 거리는 많지 않지만 양수장 창살에는 주방기기며 아기자기한 소품이 전시돼 있고,  파란 하늘과 붉은 건축물이 어우러져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양수장 앞은 추희 과수원에는 탐스러운 연둣빛 자두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게 중 몇 개는 벌써 발그스레하니 물이 들었다. 따가운 볕이 누그러지는 9월부터는 빨간 풍년이 들리라. 과수원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졌다는 한식다과카페 비비낙안이 나온다. 땀도 식힐 겸 목도 축일 겸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앉고 보니 카페의 모든 자리가 특등석이다.

“마을 언덕이 높다 보니까 꼭 헬기 띄워놓고 보는 것처럼 주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죠. 저 다리 건너편이 전주 시내인데 밤에 야경이 진짜 근사해요. 나가실 땐 카페 뒤편에 있는 전망대에도 올라가 보세요. 양수장과 함께 세워졌던 물탱크를 지금은 전망대로 꾸몄거든요.”

강신우 사무장의 당부대로 전망대에 올라선다. 만경강 줄기 따라 길쭉하게 형성된 마을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1시간이면 왕복을 하고도 남을 아담한 마을. 어디부터 둘러볼까 고르는데 마을 끄트머리로 만경철교와 삼례교가 보인다. 새로 만든 튼실한 만경철교와 이제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낡고 닳은 옛 폐철교가 젓가락 한 쌍처럼 나란히 놓여 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2011년 10월 폐쇄된 삼례교.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할머니 만나러 마을 한 바퀴

물탱크 전망대에서 길게 뻗은 내리막길을 내려간 지 10분. 정자 비비정에 도착한다. 기러기도 쉬어갈 만큼 풍치가 좋다 하여 ‘비비낙안’이라는 옛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정자 아래로 유유히 만경강과 그 뒤로 드넓게 펼쳐진 호남평야의 풍치가 퍽 아름답다. 정자의 양 옆 기둥에는 “신발 벗어시요”, “쓰래기를 벌이지 마십시요” 당부의 말이 새겨져 있다. 이건 또 어떤 어르신의 작품이려나.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완산8경 중 하나인 비비정 정자.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이거 본다고 서울에서 왔어요? 시골 풍경이 다 그렇고 그렇지 뭐 볼게 있다고 와.” 말과 달리 마을 최고 명당에 돗자리까지 펴고 경치놀음에 한창인 이경욱, 김찬희 부부가 타박 아닌 타박을 한다. 그러다 이내 “온 김에 저 쪽 폐 철교 사진이나 많이 찍고가요. 멀리서 온 분들은 옛날 철교를 좋아하데. 그냥 가지 말고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가고. 마을 할머니들이 밭에서 방금 딴 재료로 밥상을 차리는데 손맛이 좋아요” 마을 자랑이 이어진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최신식 인테리어의 레스토랑 비비정. 올 10월 야외 결혼식이 예정돼 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삼례양수장의 붉은 벽돌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정자 코앞에 놓인 삼례교는 2011년 10월을 끝으로 폐쇄 됐다. 전주와 완주를 잇는 전라선이 지나던 선로 위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다. 수명을 다한 철교의 신세는 쓸쓸하기 짝이 없지만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철길풍경은 그냥 방치하기에는 아까울 정도. 폐교를 활용해 둘레길을 조성한단다, 자전거 길을 낸단다, 귀동냥 전해 들으며 아쉬운 마음을 대신한다.

넋 놓고 풍경에 취해 있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시간이 훌쩍 지났다. 허둥지둥 레스토랑으로 향하는데 이 씨네 부부가 사진 찍으려거든 마을 뚝방길로 가지 말고 정자 아래로 난 샛길로 가보라고 일러준다. 강을 끼고 난 길이라 풍경이 좋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샛길로 빠진다. 근데 이게 길이 아니라 정글이다. 아침에 싹 틔워 저녁이면 껑충하다는 여름 잡초가 길 위를 뒤덮고 있다. 왔던 길 돌아가기엔 늦은 것 같아 잡초를 헤지며 걷는데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호랑나비며 보라색 물잠자리가 와락 얼굴에 달라붙는다. 손을 휘휘 저으며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나비 떼가 축포처럼 팔랑거리는 풍경에 또 다시 넋을 잃는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대빵’ 정도순 할머니의 지휘하에 눈 깜짝할 새 한 상이 뚝딱.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땀범벅 파김치가 돼 레스토랑 비비정에 들어선다. 그 몰골에 점심 전쟁을 끝내고 쉬고 있던 할머니들 눈이 휘둥그레. 달란 소리도 안 했는데 얼음 동동 뜬 보리차 한 대접, 계피차 한 잔을 내어주곤 선풍기 머리까지 돌려준다. 얌전히 주신 보리차를 다 비우고 “식당 일 정말 힘들죠?” 싱거운 질문을 던진다. 인사차 여쭌 것인데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온다.

“내가 70이고 이짝 언닌 80인디 애 놓고 평생을 넘의집 일하고 살았어. 하도 없는 시절이라 돈 되는 게 사람 손이랑 발밖에 없응께 일거리 찾아 저 밑에 해전리까지 품 팔러 다녔제. 하루 종일 칼질하고 집에 와선 아궁이 불 때고 물 길어다 놓고 새벽까지 잠도 못자고. 애들 밥 한끄이 먹일라면 별수 있간? 참 그때에 비하면 호강이지. 심들긴 뭐가 심들겄어.”

최순덕 할머니의 말에 임정자 할머니가 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비비정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지만, 애써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이야기. 농사지을 밭 한데기가 없고, 번듯한 지붕 집보다 위태위태한 판잣집이 더 많아 ‘빈촌’이라 불리던 비비정 마을의 과거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널찍한 홀을 갖춘 레스토랑 내부.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고생한 이야기 하다 입이 닳아버렸다는 두 할머니가 시계를 본다. 슬슬 손님 맞을 준비에 들어갈 시간. “밥 묵고 가요. 바빠도 묵고 가. 호박죽부터 찬찬히 먹고 있어.” 임정자 할머니가 껍질 까고 낱낱이 썰어 만들었다는 호박죽을 맛보는 사이 무를 숭덩숭덩, 가지는 나박나박, 오이는 총총, 할머니 요리사들의 손끝에서 눈 깜짝할 요리가 뚝딱 만들어진다.

향긋한 버섯전골은 최순덕 할머니, 밭에서 따자마자 맛낸 깨순볶음과 고추무침은 정도순 할머니의 솜씨다. 올봄에 따서 담근 매실 장아찌, 야들야들한 녹두청포묵, 손 두부에 묵은지 볶음까지…. 소담스러운 상차림을 바라보다 묘한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한다. 시골집 소반 위 제각기 다른 반찬통에 담던 반찬들이 깨끗하고 흰 접시에 담겨 있다. 생전 멋 부릴 줄 모르던 할머니가 한복 곱게 차려 입은 모습을 봤을 때의 낯섦 같은. 가슴께 간질이는 부듯함이 벅차올라 고함을 치듯 말한다. 잘 먹겠습니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음식을 내갈 땐 반찬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 2014년 9월 사진 / 구완회 기자

Tip. 비비정 마을 여행
비비정 마을은 만경강을 따라 길죽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농가 레스토랑 비비정~삼례양수장~가을자두 추희 과수원~한식다과카페 비비낙안~물탱크 전망대~비비정 정자~폐철교(구 삼례교)~만경강 뚝방길 순으로 원을 그리듯 둘러보는 데 1~2시간이 소요된다.
주소 전북 완주군 삼례읍 비비정길 96-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