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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국도여행] 42번 국도 원주~동해 구간 ‘강원도의 힘’을 보여주는 아리랑 고개
[국도여행] 42번 국도 원주~동해 구간 ‘강원도의 힘’을 보여주는 아리랑 고개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7.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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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구룡사 입구의 200년 된 은행나무.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원주] 42번 국도는 인천에서 시작되어 동해까지, 우리나라의 허리를 가로지른다. 그 중 인천~원주 구간은 라디오 교통정보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영동고속국도의 우회도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미끈하게 잘 빠진 세련된 길이다. 하지만 원주에서 시작되는 42번 국도는 이전과는 달리 투박하고 거칠다. 태백산맥이라는 한반도의 등뼈를 넘으며 삶을 지탱한 조상들의 애환이 깃든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원주 시내를 벗어나 길을 달린다. 아직은 도시의 길, 별다른 감흥은 없다. 앞으로 달릴 힘든 길을 위해 준비 중이라고 생각한다. 첫 목적지는 치악산. 원주를 말할 때 치악산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또한 치악산을 말할 때 단풍을 빼놓고도 이야기가 안 된다. 깨끗한 계곡물에 비치는 단풍 빛이 하도 곱고 아름다워 예전에는 ‘적악산(赤岳山)’으로 불리기도 한 산이 바로 치악산이다.  

흔히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면 험한 산이라고 한다. 치악산도 예외가 아니라서 일반인이 등산하기엔 무척 어렵다. 그렇다고 치악산의 절경을 포기할 순 없는 일. 가뿐하게 오를 수 있는 코스도 있다. 그중의 하나가 구룡사로 가는 길이다. 구룡사는 템플 스테이로 유명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절까지 가는 자연탐방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면 그곳부터가 등산로 겸 탐방로이다. 사실 오르막길이 있는 게 아니라서 등산로라고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다르게 불리는 명칭이 ‘자연관찰로’다.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그냥 팥빵인데도 자꾸만 먹게 되는 중독성 있는 안흥 찐빵.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코가 뻥 뚫리는 것이 역시 산이 좋다 싶다. 왼쪽으로 흐르는 계곡은 제법 한기가 느껴지는 가을인데도 훌러덩 벗고 뛰어들고 싶을 만큼 깨끗하다. 또한 사방에 펼쳐진 단풍이란! 저절로 ‘캬~’소리가 나며 가방에서 막걸리 한 병을 꺼내 길 가던 사람과 나눠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길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구룡교 앞에 선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포토타임’에 열중하고 있다. 용머리 모양의 난간도 멋지지만 뒷배경이 기가 막혀 흔히 ‘각이 나오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탐방로를 걷는 동안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시인과 어린이들이 쓴 시를 길가 나무에 매달아놓은 것이다. 미관상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원주와 치악산을 주제로 쓴 시는 혼자 걷는 외로운 객에게 좋은 길동무가 되어준다.  

구룡사에 도착해 좀 더 단풍놀이를 즐기고 싶으면 비로봉까지 가면 된다. 보통 어른 걸음으로 6~7시간이면 비로봉을 오를 수 있는데,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다 싶으면 중간지점인 세렴폭포 계곡까지 갔다 와도 된다.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비오는 날 더운치 잇게 달릴 수 있는 레일 바이크.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원주를 벗어나 횡성으로 들어가면 맛있는 먹을거리가 기다린다. 바로 안흥찐빵! 안흥은 42번 국도상의 딱 중간지점에 해당한다. 1974년 영동고속국도가 생기기 전, 42번 국도를 지나던 여행객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지나갔는데, 그 시절 심순녀 씨가 찐빵을 길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하면서부터 ‘안흥찐빵’이라는 말이 생겨났단다. 

그 말을 듣고 안흥에 오니 희한하게 배가 더 고프다. 원주에서 요기를 하고 안흥에 도착한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말이지…. 찐빵을 사서 게걸스럽게 입에 물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혼자서 여행하며 먹는 원조 안흥찐빵 맛, 요 맛! 훈련소 화장실에 숨어 먹는 초코파이 맛보다 더 기가 막히다.  

평창이 가까워지면서 많아진 건 플래카드다. 눈치챘겠지만 2014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뛰어보자는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들이다. 2010년에 이어 두 번째 실패. 평창의 아픔은 대한민국의 아픔이기도 했다. 사실 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에 취재를 다니면서 동계올림픽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다시 도전한다면서요?”라고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짙은 안개로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백봉령 정상.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평창을 지나 정선을 기점으로 42번 국도는 거칠어진다. 본격적으로 강원도의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미탄면을 지나면 비행기재가 나온다. 지금은 비행기재 터널이 뚫려 있지만 88년 이전만 해도 비행기재는 정선 사람들이 서울이나 평창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찻길이었다. 구불구불 하늘과 맞닿은 고개를 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꼭 비행기를 탄 것 같아서 ‘비행기재’라고 이름 붙였단다. 얼마나 길이 험하면 ‘타지에서 온 운전수들은 죄다 울고 왔다 울고 간다’란 말이 생겼을까. 

비행기 타는 기분을 만끽하며 고개를 넘어 아우라지로 간다.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진 아우라지는 사시사철 제각각의 풍취로 사람들을 이끄는 곳이다. 그리고 또 다른 명물인 레일바이크까지 책임지고 42번 국도가 안내한다. 

가을비가 촉촉이 오는 와중에도 레일바이크를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아우라지역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햇빛이 쨍쨍하게 비치는 날의 레일바이크도 좋겠지만 이렇게 운해가 살짝 드리워진 날의 철길 여행도 무척 낭만적이다. 아우라지역 뒤쪽으로 핀 메밀꽃은 그런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괜히 ‘센치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비도 오는데 고개를 넘으려면 마음이 급하다. 강원도 고갯길이야 험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 아닌가. 특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로 악명이 높은 백봉령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길가에서 앉은뱅이 신세를 면하지 못할 수 있다.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단풍이 곱게 물든 아우라지역.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다음으로 간 곳은 구미정(九美亭)이다. 이름 그대로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정자라 하여 구미정이다. 비가 오는 덕분에 물이 불어 정적이진 않지만 절벽에 드리워진 운해로 나름 운치가 있다. 홀로 구미정에 앉아 앞을 흐르는 골지천 물길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곳의 주인이었던 수고당 이자 선생이 부럽지 않다.  

다시 42번 국도에 오르면 이윽고 백봉령에 당도하게 된다. 백봉령은 옛날엔 조상들이 정선 임계장과 여량장으로 동해 바다의 생선과 소금을 지고 가서 영서 지역의 삼베와 곡식을 교환해 오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물물교환의 길이었다. 특히 영서 지역에서 두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동해의 간수를 옹기에 담아 지게에 지고 다니던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궂은 날의 백봉령 도로는 결코 만만치 않다. 불과 2~3m 앞의 물체도 분간이 되지 않는 길 위에서 헤드라이트는 기본이고, 비상등까지 깜빡이며 거북처럼 기어간다. 백봉령 정상에 서면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지만, 하도 상습적으로 안개가 끼는 곳이라 그 광경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백복령은 중턱에서 길이 나뉘는데, 한쪽은 옥계로 향하고 또 한쪽은 동해로 향한다. 42번 국도는 동해로 가는 길이다.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아우라지역 뒤로 핀 메밀꽃밭. 2007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백봉령을 내려오면 이윽고 동해시다. 그 전에 볼 수 있는 달방댐은 백봉령의 물길을 한 곳으로 모은 곳이다. 저수지 치고는 무척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어 눈길이 멈춰진다. 쉼터로 만들어진 정자 위에 오르면 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니 꼭 발길을 멈춰 둘러보길. 

42번 국도는 7번 국도와 만나며 끝이 난다. 동해를 바로 앞에 두고 있지만 아쉽게도 길이 끝나는 곳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백사장을 걷는 로망은 없다. 그 로망이 아쉽다면 잠시 7번 국도에게 신세를 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변화무쌍한 모습과 우여곡절 많은 사연이 있는 42번 국도가 어쩌면 우리네 인생사를 닮았다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이번 국도여행을 마치고 동해 바다 앞에 선 지금, 종점에 다다른 서운함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고작 하루를 달린 길이지만 마치 10년의 세월을 거슬러온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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