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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 따라 가는 여행] 전북 진안 마이산 굽이굽이에 품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
[전설 따라 가는 여행] 전북 진안 마이산 굽이굽이에 품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
  • 서태경 기자
  • 승인 2008.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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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마이산 돌탑.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여행스케치=진안] 예부터 영산이나 성지로 불리는 곳에 가보면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그저 ‘예사롭지 않다’는 말로 대신할 뿐. 그런 점에서 탑사와 은수사를 품은 마이산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기이한 모습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와 신비함을 간직한 마이산에 올라 암수마이봉이 전해주는 기를 흠뻑 받고 돌아왔다.

마이산 하면 탑사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산 전체를 두고 보면 탑사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탑사로 인해 마이산이 유명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사실 호남지방에서 마이산은 오래전부터 기운이 강한, 다시 말해 기도발(?)이 제대로 받는 곳으로 통해왔다. 

읍내에서 봤을 때 왼쪽의 봉우리가 숫마이봉이고, 오른쪽이 암마이봉이지만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과 느낌에서 차이가 크다. 분명한 건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모양이라는 것이다. 나무 하나 없는 돌 봉우리가 뾰족 솟아 있어 진안군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데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가 뜯겨져 나간 것처럼 보이는 게 궁금증을 더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타포니지형이라 하는데 1억년 전 호수였던 곳이 지각변동으로 융기한 뒤 내부 고열에 의해 팽창되면서 붙어 있던 작은 바위들이 떨어져나갔고 이때 여기저기 뜯겨져 나간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자연의 신비와 더불어 마이산이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곳곳에 재미있는 전설이 얽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이 하도 기이해서 그런지 예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참 많은데,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산행을 하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신비한 돌탑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이야기 하나
먼 옛날 죄를 짓고 하늘에서 쫓겨난 산신 부부 이야기다. 산신 부부는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오랜 시간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내라는 벌을 받게 되는데, 드디어 세월이 흐르고 천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때 남편은 사람들의 눈에 띄면 부정을 탈 수 있으니 한밤중에 하늘로 가자 했는데, 아내는 한밤중은 너무 무섭다며 푹 자고 이른 새벽에 올라가자고 한다. 남편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었지만 결국은 아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고 산은 하늘을 향해 쑥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아랫마을에 사는 한 아낙이 치성을 드리기 위한 정한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 부부는 그 자리에서 굳어 암수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암마이봉은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데, 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천차만별이고 또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해석은 제각각으로 할 수 있다.

마이산은 보기엔 험해 보이지만 봉우리 주변만을 도는 것이라 산행 시간이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산행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완만하고 돌계단이 놓여 있어 등산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남부와 북부 주차장에서 모두 시작할 수 있지만 이용미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남부주차장에서 시작을 해야 마이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단다. 문화·역사적인 배경과 연관 지어 마이산을 구석구석 이해하려면 남부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기 때문. 북부에서 오를 경우 계단이 놓여 있어 오르기는 쉬울지 몰라도 산행을 한다는 기분도 나지 않을뿐더러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부부봉의 모습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사실 제대로 된 마이산 산행은 남부주차장 이전에 자리한 이산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드라마 <이산>과는 아무 관계없지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대한광복기념비’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비석과 김구 선생이 쓴 주필대가 있는데, 대부분이 그냥 지나쳐버려 아쉽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무수한 돌탑에 둘러싸여 있는 탑사.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이야기  둘
정확히 말해 전설은 아니지만 마이산과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탑사에 이르기 전에 만나는 인공호수인 탑영제에서 조금 올라가면 명려각과 작은 비가 나오는데 설명을 듣고 나면 저절로 신기하다는 말이 나온다. 명려각은 조선시대 유일한 부부 시인인 삼의당 김씨와 담락당 하욱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다른 곳이었다면 모르지만 부부봉으로 유명한 마이산에 부부 시인이라니, 우연치고는 재미있어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이 둘은 어릴 적부터 재주가 비슷해 천생배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원래 출생지는 남원이지만 중년에 진안으로 이주해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시집살이와 남편의 과거급제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에서도 다양한 작품을 많이 남겨 허난설헌,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명려각 옆에 서 있는 비에는 부부가 서로 주고받은 시문이 새겨져 있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탑사의 대부분이 외줄탑이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마이산 전체에 8개의 등반로가 마련되어 있지만 현재 암마이봉 코스는 2014년까지 휴식년제 중이다. 숫마이봉은 예부터 영산이라고들 해 사람들이 아예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두 개의 봉우리 중 암마이봉에만 오를 수 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불가능해 탑사와 은수사, 화엄굴, 탑영제 등을 에두르는 등산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명려각에서 탑사는 그리 멀지 않다. 80여 기의 석탑들이 만들어낸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명물이 된 탑사. 언론에 소개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지는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벌써 오래전부터 이곳에 탑이 세워져 있었고 기도를 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단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암마이봉에 기댄 채 자라고 있는 능소화도 미스터리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이야기  셋
이갑룡 처사가 만든 개인 사찰(태고종)로 지금도 탑사의 주지는 이 처사의 3대손인 혜명스님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국 영산을 다니며 수련을 하던 중 25세 되던 해인 1880년 마이산에서 탑을 쌓기 시작했다는 것이 전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고 또 이 처사의 후손들이 주장하는 일이니 뭐가 맞고 틀린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산속에서 밭을 일구며 홀로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선비처럼 보이는 젊은이가 머슴을 살겠다며 찾아왔다고 한다. 먹고 자게만 해주면 된다는 말에 선비를 머슴으로 받아들였고 언제부턴가 잠을 자고 나면 탑이 하나 둘씩 생겨나더라는 것이다. 

약 3년 동안 탑을 쌓고 그 선비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한다. 그 탑군을 이 처사가 관리하고 몇 기를 더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은수사 너머 화엄굴 석간수를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탑사 주타에서 보이는 전경.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신기한 점은 마이산 주변에 이처럼 탑을 쌓을 정도의 돌이 많지 않은데 어디에서 이 돌을 가져왔느냐는 것. 또 긴 세월 동안 무너지지도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수십 기의 탑이 나름의 규칙을 갖고 흩어져 있는 모습은 명물임에 틀림없다. 탑의 수는 많지만 스타일은 두 가지다. 5기의 원뿔탑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외줄탑이고 대웅전 뒤에 있는 천지탑이 탑사의 주탑이다. 

기가 워낙 강한 지역으로 통해 탑사 주변을 돌다보면 다리가 붕붕 뜬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고 기분이 묘하다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뭔가 다른 기운이 있긴 있나보다. 

한쪽엔 암마이봉의 절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아슬아슬 쓰러질 듯한 탑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은 분명 예사롭지가 않다. 천연기념물인 줄사철나무와 암마이봉에 붙어 생명을 이어가는 능소화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다.

내친 김에 은수사와 화엄굴까지 가본다. 은수사에 오르면서 보이는 숫마이봉의 모습이 재미있다. 어찌 보면 투구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코끼리 머리처럼 보여 기념사진을 찍기에는 더없이 좋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태극전 내에 있는 몽금척도.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이야기  넷
은수사는 태조 이성계의 창건설화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반란을 통한 개국이었으니 어떤 당위성이 필요했고 그 장소로 은수사가 낙찰된 것이다. 은수사(銀水寺)라는 이름 역시 태조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물이 은처럼 맑다고 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또 꿈에 신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라는 금척(金尺)을 받았는데 그때 꿈속에서 본 산이 마이산이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은수사에 있는 태극전에는 이례적으로 전(殿)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꿈에서 금척을 받은 것을 그린 ‘몽금척도(夢金尺圖)’가 바로 여기 태극전 안에 있다. 조선시대 어좌 뒤에 세워진 병풍 그림인‘일월오봉도’가 태극전 외벽에 그려진 것도 눈에 띈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코끼리처럼 보이는 숫마이봉의 모습이 재미있다. 2008년 2월. 사진 / 서태경 기자

조선 개국의 당위성을 부여해준 곳이었던 은수사는 이성계를 비롯해 조선왕조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요즘은 매년 10월 12일 진안군민의 날을 맞아 마이산신제가 열리고 있다. 

사실 은수사에서 태극전 말고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있다. 역시 이성계와 관련이 있는데 그가 마이산에서 기도를 한 후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넘은 청실배나무다. 일반 배나무의 수령이 60~70년인 것을 감안하면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최근 670년 정도 되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인지 청실배나무는 기이한 현상으로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바로 그 유명한 ‘역고드름 현상’. 겨울철 그릇에 물을 담아 배나무 주변에 놓으면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면서 얼음이 뾰족 솟으며 얼어붙는 것. 마이산 전역에서 이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배나무 주변에서 가장 두드러진단다. 하지만 날씨가 무조건 춥다고 역고드름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때나 볼 수는 없다. 다만 사찰 측에서 역고드름을 냉동실에 보관을 하기도 하므로 봄 정도까지는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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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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