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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프란치스코 교종이 다녀가신 곳 서소문 순교성지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 프란치스코 교종이 다녀가신 곳 서소문 순교성지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4.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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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지난 8월, 대한민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가 찾은 곳들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소문 순교성지였다. 절두산과 새남터 순교성지에는 기념 성당도 있고, 순교기념관도 있지만, 서소문 공원 안의 서소문 순교성지에는 현양탑 하나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선, 용어정리부터 좀 하고 넘어가야겠다. 한국천주교회는 프란치스코 교종 방문을 맞아, 우리에게 익숙한 교황이란 호칭 대신 ‘교종(敎宗)’이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이란 글자 그대로 천주교의 황제란 의미다. 실제로 교황은 전세계 가톨릭의 수장일 뿐 아니라 바티칸이란 유엔 가입 국가의 원수다. 그런데 사실 교황의 영어식 이름이 ‘Pope’에는 황제란 의미가 없다. 라틴어 Papa에서 나온 말로 ‘아빠’란 의미다. 그런데 400여 년 전 처음 천주교가 아시아로 들어왔을 때, 거의 황제나 다름 없었던 교황의 지위를 고려해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단다. 

하지만 교황이란 호칭이 너무 권위주의적이란 비판이 있어서, 1960년대 중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면서 ‘교종’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종’이란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다. 현재 중국은 교황, 일본은 교종이란 이름을 쓰고,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그 둘을 혼용해서 쓰고 있었는데, 이번 교종 방한을 계기로 천주교에서 교종이란 이름을 밀고(?) 있으니, 원하는 대로 불러 드리는 것이 예의일 듯 싶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서소문 순교성지 인근에 자리잡은 약현성당은 1893년에 건립된 근대 문화유산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현양탑 하나로 남은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
‘현양탑’도 익숙지 않은 용어다. ‘현양(顯揚)’이란 ‘이름이나 지위 따위를 세상에 높이 드러내다’라는 뜻. 그러니 순교성지의 현양탑이란 이곳에서 순교한 분들의 고귀한 이름을 세상에 높이 드러낸다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에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곳이 대한민국 천주교의 최대 순교성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현양탑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좀 의외다. 서울의 다른 순교성지들이 기념관, 기념성당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왜 그랬던 걸까. 그 이유는 급격히 팽창하던 서울의 도시 개발 때문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이곳을 매입하여 기념 시설들을 만들고자 했으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아파트와 공원이 들어섰다. 대신 이곳에서 길 하나 떨어진 약현성당에 순교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약현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남규 화백이 제작한 국내 최초의 유리화 작품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약현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혼합된 스타일이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조선시대 한양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었지만, 지금 사소문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이 들어선 자리는 조선시대 ‘서소문 밖 처형장’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의 공식 처형지였다.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으로 인한 죄인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는데, 그중 모반죄는 형장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대부분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유교 경전인 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 이곳은 바로 사직단(현재의 사직공원) 우측이었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순교전시관에서 당시 모습을 알려주는 전시물을 볼 수 있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정약용의 형, 정약전도 목숨을 잃다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후 서소문 밖 처형장은 가장 중요한 순교터가 되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서학을 믿는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게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한 것이다. 순교는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을 비롯해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등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100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4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이들 가운데 기해박해로 순교한 41위(位)는 지난 1984년 교종 요한 바오로2세가 방문했을 때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번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종은 신유박해 순교자 25위를 복자로 지정했다. 성인과 복자란 모두 사후에 그의 덕행을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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