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파주]화창한 날씨가 밖으로 나가라며 자꾸만 등을 떠미는 이 계절에 걷기만큼 좋은 여행도 없지 싶다. 특별한 준비 없이 당장에라도 시작할 수 있는 게 걷기여행의 가장 큰 장점. 초보자도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는 문산역에서 임진강역에 이르는 구간을 걸어봤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친숙한 여행
10년 전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 비싼 교통비 탓에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또 배낭여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택시는 커녕 버스나 전철도 반드시 타야 할 때만 이용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걷기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컨디션도 한결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걷기와 또다시 이별을 했다.
화창한 늦봄과 초여름 사이, 모처럼 그때를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하는 걷기 여행인지라 간단한 구간을 코스로 삼았다. 장기도보여행이라면 이것저것 챙길 게 많겠지만 하루 이내로 끝내는 코스는 편안한 운동화와 간단한 간식, 식수 정도면 충분하다.
코스는 경기도 파주 문산역~임진강역까지로 잡았다. 초보자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구간이다. 또 1시간 간격으로 열차가 운행되고 있어 돌아오는 교통편에 대한 걱정도 덜 수 있다. 갓길을 걷는 것이라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 어디를 간들 자동차도로와 동떨어진 곳을 찾기 힘들어졌다. 다행히 이 구간은 그래도 한적한 편이다(담양의 메타쉐쿼이아 길 같은 곳도 따져보면 갓길이다).
오르막과 터널이 없는 편안한 길
일단 문산역까지는 열차를 타고 간다. 역에서 나와 선문교를 지나면 서울과 전곡, 임진각으로 통하는 문산사거리에 이르는데 지금부터는 무조건 임진각 방면으로 걸으면 된다. 본격적인 코스의 시작이다. 갓길은 사람 두 명 혹은 오토바이 한 대 정도 지날 수 있는 흙길인데 간혹 난폭한 운전자들이 경적을 크게 울려 깜짝 놀랄 때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구간이다.
게다가 체력 소모가 심한 오르막길이 없고 또 도보여행의 최대의 적인 터널이 없다는 장점도 있다. 걸음이 느린 사람도 그리 뒤처질 만한 정도는 아니라서 여유를 갖고 천천히 걷기를 권한다. 문산역에서 여우고개사거리까지는 25분 정도, 여기서 운천역까지는 25분, 운천역에서 임진강역까지는 40분 정도 걸렸지만 개인차가 있음을 밝혀둔다.
여우고개사거리까지는 거의 힘이 들지 않았지만 작은 공원을 보니 갑자기 쉬고 싶어진다. 나름대로 모양새를 갖춘 공원 벤치에 앉아 물과 간식을 먹으며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운천역까지는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걸어가야 하는데 중간에 보이는 대덕골이라는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자체는 현대식으로 단장했지만 이곳 역시 외지인을 반기는 모습이 여느 농촌과 다르지 않다. 동네 어귀에 모여 있던 어른들이 “째까난 동네 뭐 볼 게 있어 왔냐”며 궁금해 하신다.
임진강역까지 걸어간다는 대답에 “기차 타면 금세 갈 걸 왜 걷느냐”는 걱정도 해주신다. 난생처음 가보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니, 이 또한 생각지 못한 재미다. 아마 차를 타고 갔더라면 휭하니 지나쳐버렸을 것 중에 하나다.
마을에서 코스의 중간을 한 번 끊으니 운천역까지는 금세 도착한 듯한 느낌이다. 운천역은 그 자체가 볼거리는 아니지만 도보여행자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코스의 딱 중간 지점으로 식사를 하거나 물이나 간식 등을 살 수 있다. 의외로 식당이 많으므로 끼니를 해결할 수도 있다. 앉아서 쉴 만한 곳을 찾는다면 역이나 버스정류장에 마련된 의자가 제격이다. 단 그늘이 거의 없어 더위를 식히기는 마땅치가 않다.
이제 임진강역까지는 통일로를 따라 줄곧 올라가면 된다. 구간 중 마지막 코스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4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어 큰 부담은 없다. 마정교차로 부근부터는 자동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도로가 갑자기 한산해지고 또 임진강역 가까운 곳부터는 보행자도로가 설치되어 있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임진강역이 보이면 도보여행의 코스는 거의 끝났다고 보면 된다. 이곳부터 평화누리까지는 공원을 돌아온 듯 자유롭게 다니면 된다. 2시간 동안 열심히 걷기만 한 다리에 휴식을 줄 차례다.
걷기 끝에 만난 선물, 평화누리
코앞의 임진강역은 어릴 적에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어두침침하고 긴장감이 감도는 대신, 이제는 공원과 놀이기구, 카페까지 들어선 어엿한 휴식처로 탈바꿈했다. 자유의 다리와 그 너머 비무장지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임진각전망대와 다양한 무대를 만날 수 있는 공연장, 장단콩전시관, 경기평화센터 등이 둘러볼 만하다.
끊어진 임진강철교, 철마는 달리고 싶다, 경기평화센터 등은 안보와 관련된 곳으로 6월이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곳이다. 반대로 자유의 다리와 달리 평화누리는 밝은 기운이 넘친다. 그 자체로 멋진 그림이 되는 바람개비 언덕과 독특한 외관의 생명촛불파빌리온 등이 냉전시대의 무거운 분위기를 화해와 평화라는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5월부터 10월까지는 평화누리 일대에서 다채로운 상설공연이 열리므로 이에 맞춰 찾아가면 더욱 좋겠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꾸준히 퍼포먼스나 영화 상영, 특별기획전 등이 열리므로 사전에 평화누리 홈페이지(www.ggpc.org)를 참고하면 된다.
또 공연이 아니더라도 평화누리엔 볼거리나 소일할 만한 것들이 많으므로 도보여행은 최대한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넉넉잡아 오후 1시 전에 평화누리에 도착하고 오후 나절을 여유롭게 보내면 누구에게나 부담 없는 걷기여행 코스가 완성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