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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나의 고향 이야기] 시인 이길원 님의 고향  청주,  내수 마음의 고향으로 가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나의 고향 이야기] 시인 이길원 님의 고향  청주,  내수 마음의 고향으로 가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 이길원 시인
  • 승인 2008.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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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5월. 사진 / 이길원 시인
예나 지금이나 청주를 지키고 있는 무심천. 2008년 5월. 사진 / 이길원 시인

[여행스케치=청주]고향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시리다. 고향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들어서기만 해도 잔잔한 흥분이 뒤따른다. 톨게이트만 지나면 사열하듯 줄지어 기다리는 플라타너스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청주를 지나 30리나 더 들어가는 내수(內秀)가 바로 내 고향이다. 

지금이야 청주와 내수가 지척이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는 청주 상급학교로 진학해 기차를 타고 다니는 형들이 무척 부러웠다. 내수의 초등학교에서는 불과 몇 명 정도만 청주중학교에 진학할 때였으니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날마다 기차를 타고 청주로 통학하는 형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나도 나중엔 청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어 6년 동안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통근 열차라고 불리던 당시의 기차는 아침 7시에 한 번 청주로 나가고, 저녁 5시에 한 번 청주에서 충주 방향으로 떠난다. 그러니 아침이나 저녁이나 기차를 놓치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청주에서 내수까지 하루에 한두 차례 터덜터덜 버스도 다니고 있었지만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엔 버스를 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천상 30리 길을 걸어서 가야 한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기차는 꼭 타야만 했다. 

2008년 5월. 사진 / 이길원 시인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 길을 지나면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렘이 더해진다. 2008년 5월. 사진 / 이길원 시인

그런 학생들의 마음을 아는지 기차는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면 동네가 다 알아들을 만큼 큰소리로 ‘빽~’ 하는 경고음을 여러 번 길게 내주기도 한다. 그 소리가 들리면 기차를 놓칠세라 헐레벌떡 달려간다. 학생들이 달려들어 우르르 기차를 타면, 또다시 허연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기세 좋게 ‘빽~’ 하며 소리치곤 칙칙폭폭 느린 걸음으로 출발한다.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건 사람이 많을 때 기차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닌 기억이다. 한여름이면 선풍기도 없는 기차 안은 찜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힘센 고등학생들이 쫄망쫄망한 어린 중학생들을 가운데로 몰아넣곤 입구에 매달려 시원하게 가는 게 아닌가. 어린 마음에 그게 또 부러웠다. 

고등학생이 되자 이젠 내가 중학생들에게 “너희는 위험해” 하면서 안으로 몰아넣곤, 손이라도 놓치면 큰일일 아슬아슬한 문 입구에서 자연풍을 즐기며 다녔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이면 가끔 친구들과 포장도 안 된 신작로를 걸어서 집으로 가기도 했다. 학교, 집안, 여자 이야기 등을 두런두런 나누며 어쩌다 먼지를 날리는 자동차라도 지나가면 괜스레 욕설도 한번 해대며 걸어갔던 그 길이 그립다.  

청주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학생들도 누구누구 하면 다 알던 시대였다. 혹 여학생과 같은 방향으로 1km만 걸어가도 연애한다고 소문이 날 만큼 작은 도시였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무심천이다. 

무심천은 아주 맑고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젊은 날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 곳 없는 우리들의 좋은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달 밝은 밤, 가슴 콩닥거리며 여학생과 강변에 나가 노래를 부르던 기억은 지금도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이래 고향 가는 길이 점점 뜸해졌다. 그러나 갈 때마다 발전하고 변모해가는 고향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서운하기도 했다. 잊혀져가는 고향 냄새 때문일 게다. 그렇게 우리를 설레게 하던 무심천도 옛날의 그것이 아니다. 제방도 언덕도, 첨벙첨벙 뛰어들며 멱 감던 맑은 물도 사라지고 삭막한 건물들이 우리의 추억을 방해하고 있다. 

버스 타고 먼지 풀풀 날리며 달리던 내수도 이미 시골의 산마을이 아니다. 불과 50년 만에 고향은 몰라보게 변해가고 있었다. 흰 다리 밑으로 마을을 감싸고 흐르던 물줄기는 끊겼다. 송사리가 놀고 마을 아낙들이 빨래하던 자리는 집들이 대신하고 있다. 

내가 잡던 송사리며 내 유년의 어깨를 내려보던 까치도 보이지 않았다. 키 큰 어른만 보면 그냥 인사를 했고, 그러면 “어, 누구 아들이구나” 하던 고향의 정겨움도 없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청주 입구에서 고향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플라타너스가 있어 고향은 언제나 마음속에서 어린 날의 향수를 꿈꾸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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