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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숲 여행]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수백 년 지켜온 세월 “못생겨주어 고맙습니다”
[숲 여행]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수백 년 지켜온 세월 “못생겨주어 고맙습니다”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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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쭉 뻗은 금강소나무.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울진] 한없이 곧은 나무가 있다. 금강송(金剛松)이다. 우리나라 토종나무인 금강송은 청렴한 선비처럼, 충절을 지키는 장군처럼 곧다. 하늘을 뚫을 듯 뻗은 기세는 우리 민족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소나무 중의 소나무’로 불리며 예부터 ‘임금의 나무’로 불리던 금강소나무를 찾아 울진을 찾았다. 

해송과 육송의 교잡종으로 알려진 금강송은 봉화, 울진, 영양, 영덕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울진 소광리의 금강소나무숲은 최고로 좋은 품질을 가진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평균 나이 150살, 평균 높이 23m의 금강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520년 된 할아버지 소나무가 2그루에 200살이 넘는 소나무만 8만 그루에 이르며 지름 60㎝를 웃도는 아름드리 소나무도 1700그루나 있다. 조선 성종 때부터 왕실이 키운 거목들이다. 

그러나 금강송의 일생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일본 강점기 때는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 일본으로 실어 날랐고, 한국전쟁 때도 수많은 금강송들이 불에 타 사라졌다. 마구잡이 벌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잘린 나무들이 봉화의 춘양역을 통해 각지로 실려 나가 금강송은 ‘춘양목’이란 슬픈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맑은 계곡.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소광리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이 오지 중의 오지였기 때문. 조선 숙종 6년에 금강송을 보호하기 위해 입산이 금지됐던 소광리 금강송 숲은 1959년 육종림으로 지정된 후 민간인의 출입이 오랫동안 금지됐었고, 1982년부터는 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해 본격적인 보호와 보전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금강소나무를 최고로 치는 이유는 줄기가 곧고 목질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황장목’이란 또 다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장(소나무의 속부분, 심재부)이 일반 소나무에 비해 훨씬 넓고 단단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잘 썩지 않는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조선시대엔 궁궐에서 자주 쓰였던 것이다. 후대에는 봉정사 극락전과 경복궁 복원에도 수 그루가 사용되었다.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10월 말까지 탐방로를 확대해 개방하고 있지만 그것을 아는 이들이 적은 탓인지 마주치는 탐방객 하나 없다. 게다가 이 진입로로는 버스가 드나들지 못하니 그 호젓함은 더하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길을 따라 이어진 금강송.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맑디맑은 개울을 몇 번이나 지나고 나니 대광천변 바위에 심상치 않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장봉계 표석’이라고 불리는 이 바위는 조선 왕실에서 금강송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한다’는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소광리의 표석은 숙종 6년(1680년)에 새겨진 것으로, 그 구역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 이름들과 ‘길(吉)’이란 사람을 산지기로 명한다는 내용이다. 

관리소 앞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소나무숲으로 들어간다. 멀리서 보니 이곳 소나무의 색이 참으로 진하게 붉다. ‘적송’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소나무가 원래 그러려니 하니 숲 해설사가 그 전설을 알려준다. 

“울진에는 사랑바위란 것이 있는데, 그 전설과 연관이 있어요. 옛날 벼랑에서 삼지구엽초를 따던 오라버니가 실족사하자 사흘 밤낮을 통곡하던 누이동생이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고 해요. 이때 흘린 누이의 피가 소나무에 스며들어서 유난히 울진의 금강소나무가 붉은 것이라지요.”

실제로 봉화나 삼척 등지에도 금강소나무가 있지만 유독 이곳의 소나무가 더 붉게 느껴지는 건 사랑바위의 전설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은 범상치 않은 입김을 토해낸다. 그것은 한 많은 우리네 역사를 수백 년 동안 지켜본 거목들의 한숨이다. 살아 있는 역사의 숨결이다. 역사의 현장에 서서 편안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미래를 위해 심은 어린 소나무와 보호비.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금강소나무 전시관 앞에서 유난히 연륜이 묻어나는 금강소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나간 나무의 줄기는 유난히 휘어지고 비틀렸다. 여기저기 갈라진 껍질은 노인의 주름살을 닮았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할아버지 금강송’이다.  

이 자리를 지킨 지 520여 년이 지났으니 명실상부한 소광리 터줏대감이다. 할아버지 금강송이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못생겨서’이다. 가지가 워낙 많이 휜 ‘추목’인 덕분에 목재로서 가치가 없어 벌목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소광리 전체의 노송들도 마찬가지다. 수령이 수백 년씩 되는 나무들은 어김없이 허리가 휘거나 가지가 많아 못생긴 것들뿐이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아니고 ‘못생겨주어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 상황이다. 

할아버지 금강송의 맞은편엔 금강송전시관이 자그마하게 만들어져 있다. 사실 전시관이라고 부르는 게 민망할 정도로 작지만, 일반 소나무와 금강송을 대비해서 보여줘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소나무숲이라고는 하지만 숲이 오로지 소나무들로만 이뤄진 건 아니어서 산책로 주변으론 참나무, 사시나무, 돌배나무, 박달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이들은 가을이면 고운 단풍을 피워내는 나무들이어서 뜻하지 않게 단풍놀이도 덤으로 한다.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500살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 금강송. 2008년 10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미인송은 350살 먹은 매끈하게 뻗은 소나무다. 높이가 35m, 지름이 82㎝에 이르니 금강송에게는 최고의 찬사인 ‘I라인’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셈이다. 공생목은 120살 소나무와 80살 참나무의 줄기 일부가 붙어 있는 희귀한 모습인데, 어찌 보면 남녀가 입을 맞추고 있는 형상 같기도 하다. 못난이 나무는 한 나무에 굵은 줄기가 두 갈래로 나뉘어 희한하게 생겼다. 하지만 굳이 못난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소나무의 곡선이 아름답기만 하다. 

넓은 임도를 따라가며 소나무들을 감상하다 이윽고 숲으로 들어선다.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울창한 솔숲을 거닐며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솔향기에 맡겨본다. 무엇 하나 나무들에게 해준 것이 없지만 나무들은 아낌없이 나에게 좋은 공기를 선물하고 있다. 그래서 중간에 듬성듬성 보이는 불에 탄 금강송의 흔적을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탐방로의 정상에 이르니 저 멀리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소나무의 체취를 섞어 상쾌한 느낌을 느끼게 해준다. 군자의 기개를 몸으로 받으니 이 또한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으랴. 조용히 소나무에 손을 대고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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