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남양주] 서울과 경기, 춘천을 이으며 문화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하는 남양주시 모란미술관. 이곳엔 수많은 조각품 사이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있고, 사유하며 걸을 수 있는 조용한 길이 있다.
파란 철문 한쪽이 빠금이 열려 있는 모란미술관,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멀리 산이 흐릿한 배경으로 깔리고 드넓은 잔디가 펼쳐진다. 오솔길을 따라 본관 앞으로 총총 걸어간다. 본관은 제주도의 녹차박물관 ‘오설록’을 디자인한 건축가 김동주의 작품이다. 하얀색의 깨끗함과 파스텔톤의 편안함이 풍경과 함께 자연스레 조화를 이룬다. 역시 ‘환경 안에 사람이 녹아들 수 있는 건축물’을 지향하는 건축가의 작품답다.
건물을 향해 다가가는데 그대로 발길이 멈춰진다. 금아 피천득의 동상이다. 얼마 전 <사랑하다 떠난 이>라는 주제의 추모전이 그가 잠든 모란공원과 이곳 미술관에서 치러졌단다. 며칠 전 책꽂이를 살피다 피천득 씨의 수필집 <인연>을 뽑아 배낭에 넣어두었던 터였다. 가을에 어울리는 결 고운 단어들이 마음을 차분히 앉혀주었고, 그가 삶을 관조하는 긍정적인 태도는 불만 일색이던 하루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이 참에 보게 된 그의 모습에서 신비로운 ‘인연’의 힘이 느껴진다. 가르침만큼이나 존재감이 컸기에 1:1 비율로 제작된 동상이 왜소하게 보인다. 수필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영’이라는 딸의 이름이, 이 동상의 작품 설명란에 ‘최현승 피수영 作’이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다.
전시관 안으로 발길을 옮길까 하다가 아무래도 잔디가 너른 야외조각공원으로 마음이 먼저 간다. 모란미술관은 조각전문미술관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28만3800㎡의 잔디에 조각품 110점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잔디가 넓은 만큼 가꾸는 데에도 많이 신경을 쓴다는데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것이 가능하다. 늦가을에는 잔디 위에 낙엽이 떨어져도 일부러 쓸지 않고 그대로 둔단다. 사각사각 낙엽을 밞으면서 걷는 미술관 길이 더 운치 있기 때문이리라.
본관을 중심으로 앞뜰에 해당하는 야외1전시장과 본관 옆의 야외2전시장, 뒤뜰인 야외3전시장을 차례로 둘러본다. 조각품의 향연에 잔디 위를 종횡무진 오가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 서서 작가의 온기를 느껴본다. 구본주 씨의 <이대리의 백일몽>이다. 스케이트보드를 탄 우리의 ‘이대리’는 옷깃을 휘날리며 한창 속도를 내고 있다. 무한질주를 꿈꾸지만 실로 그는 반쯤 잘려나간 쳇바퀴 속의 신세다. 숨이 막히도록 빠르게 달리지만 결국은 정해진 일상 속이라는, 대부분의 직장인이 느낄 법한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조각품을 한참 보고 있는데 잔디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 테라스에서 비를 피한다. 촉촉한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온다. 시원한 빗소리에 삶 구석구석 배어들었던 상념들이 씻겨 내려간다. 이 여유에 기분이 맑아진다.
아까 지나쳤던 본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기획전시 <움직이는 풍경전>이 열리고 있다. 풍경이 움직인다? 실로 우리네 인간은 단지 한순간에 본 것을 풍경이라 생각하고, 멈춰진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움직이는 풍경전>은 우리가 멈추었다고 착각한 풍경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바꾸어준다.
이곳에선 여러 가지로 자연스레 마음을 놓아두게 된다. 뜻밖의 반가운 ‘인연’, 가만가만 들을 수 있는 빗소리,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포근한 잔디, 그리고 그 위를 걸으며 사색으로 빠져들 수 있었던 시간…. 바람은 선선하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해진, 가을 소풍 길의 단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