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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추억여행] 태안 버스 차장 2호 김미숙, 김호연 부부 미남 기사에 친절한 안내양까지, “이 버스 증말 괜잖어유~”
[추억여행] 태안 버스 차장 2호 김미숙, 김호연 부부 미남 기사에 친절한 안내양까지, “이 버스 증말 괜잖어유~”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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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태안버스 차장 2호 김미숙, 김호연 부부.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태안] 요즘 버스 안내양이 어디 있냐고? 맞다, 보통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딱 한 군데, 태안으로 가면 ‘안내양 누나’를 볼 수 있다. 태안군이 관광활성화 차원에서 2006년 부활시킨 안내양제도가 인기를 얻으면서 최근 운행이 늘어나게 된 것. 그 추억의 버스를 타봤다.

‘안내양 누나’가 자취를 감춘 것은 1988년. 88서울올림픽과 함께 ‘선진 교통 도입’이라는 명목으로 버스 안내양이 사라진 지 18년 만의 ‘부활’이었다. 태안에서는 1984년 이후 22년 만이다. 태안에서는 원래 안내양이라는 말 대신 ‘차장’이라는 말을 썼다. 1호 차장은 정화숙 씨 단 1명. 2007년에 ‘2호 차장’인 김미숙 씨가 배치되었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버스 내에 붙어 있는추억의 영화 포스터.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버스가 출발하기 전, 승객들과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김미숙 씨의 버스를 타기로 한다. 운행시간이 다른 버스와 겹치는 것도 이유였지만 꼭 이 버스를 타고 싶었다. 그 이유는 하루 두 번 김미숙 차장이 타는 버스의 운전기사가 바로 김씨의 남편인 김호연 씨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함께 모는 버스라…, 아주 어렸을 적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내 기억이 닿은 한 이런 버스는 처음 타본다. 버스 안쪽에 붙여놓은 <진짜 진짜 좋아해>,  <바보들의 행진> 등의 영화 포스터도 낯설기는 마찬가지. 

“남편이 버스 운전만 15년째유. 어느 날 저한테 버스 차장 자리가 있다고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묻데요. 같이 다니면서 돈도 벌고 얼굴도 더 자주 볼 수 있고. 그때부터 시작했슈.”

그렇게 태안군 2호 차장이 된 김미숙 씨는 얼마 전까진 남편의 차만 탔었다. 그러던 것이 버스 노선과 운행 횟수가 늘어나면서 지금은 하루에 두 번만 타고 다른 두 번은 다른 기사의 차에 탄다. 

오전 11시 40분. 태안버스터미널 만래 행 버스에 보따리를 잔뜩 든 할머니들과 지팡이 하나씩을 든 할아버지들이 몸을 싣는다. 김미숙 씨가 흰 장갑을 끼며 바빠진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1버스의 종점인 만래. 서해안 작은 포구의 정취가 가득하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어서 오셔유, 짐 이리 주시고 앞자리에 앉으셔유.”
안내양이 있던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나로선 김미숙 씨의 친절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김씨가 입은 자주색 유니폼도 아직까지는 적응이 안 된다. 이 유니폼은 나름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작된 것이란다. 옛날 안내양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가 양복점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만든 것. 

“어여 와유. 할매는 오늘 짐이 왜 이리 많어유. 엄메 이걸 어찌 여그까지 들고 오셨데? 어여 가서 앉으셔유. 버스 출발혀유.”  

출발 시각이 되자 김호연 씨의 버스가 유유히 터미널을 빠져나간다. 버스 안의 풍경은 여느 시골마을 버스 안의 모습과 같다. 장에 다녀오느라 적당히 풍기는 마늘 냄새, 고추 냄새, 할아버지들의 담배 냄새가 섞여 30여 년의 시공간을 초월한다. 

아랫마을 점미네 할머니, 윗마을 동구네 할아버지 이야기 등이 버스 안에서 맴돈다. 태안에서도 외곽 노선을 다니는 버스이니 타는 이들은 매번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였지만 모두가 이웃사촌인 분위기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승객과 담소를 나눈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엊그제 박씨 할아부지는 손을 다치셨단디?”
김미숙 차장도 승객들 이야기에 빠질 수 없다. 하루에 두 번씩 이 노선의 버스를 타니 마을 사람들 중에는 김 차장을 통해 이웃 마을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경우도 많다. 안내양 역할뿐 아니라 마을 소식 전달자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시내 구간을 벗어나자 한 사람 두 사람 버스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김미숙 씨는 활기차게 “안녕히 가셔유”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남편인 김호연 씨도 마찬가지다. 운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거울을 통해 멋있는 눈웃음과 함께 “살펴 가유” 하는 인사를 건넨다. 

“저 양반은 만래만 한 3년 댕겼슈.”
버스에 타고 있던 한 할머니는 읍내에 나올 일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김씨 부부가 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고 한다.  

“이뿌잖유”라는 단 한 마디로 모든 이유를 대신하지만 그 말 속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안다. 저렇게 부부가 싹싹하게 일도 잘하고 인사도 잘하고 항상 웃으며 이것저것 승객들을 챙기니 일부러 이 버스를 탄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무거운 짐은 이래 줘유.” 승객의 짐을 옮기는 김미숙 차장.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노인네들 짐도 들어주고 돈도 받아주니 울메나 편해유. 아들딸보다 더 잘허는디.” 
한 할아버지는 내리면서 ‘까만 봉다리’ 하나를 건넨다. 김미숙 씨가 “매번 뭐 이런 걸 주신댜? 잘 묵을께유” 하는 걸 보니 먹을거리인가 보다. 김씨의 버스를 타는 노인들 중엔 이렇게 부부가 예쁘고 고마워서 채소나 과일을 싸주기도 한다. 어떨 땐 김씨의 동전가방에 사탕을 한가득 넣어주기도 한단다.  

그런데 아까부터 김호연 씨는 마주 오는 차가 없는데도 경적을 울리고 있다. 약간 시끄러워 창밖의 먼 산이나 보자고 있으니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저씨도, 밭에서 채소를 가꾸던 아주머니도 누구랄 것 없이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던 것.

“꼬불꼬불 시골길이다봉께 버스 들어오는 걸 잘 모를 수도 있어유. 그래서 버스 온다고 알릴라고 긍 것도 있구유, 한 3년 계속 이 길만 다니니 다 아는 사람들이니 인사하는 거유. 차를 대놓고 일일이 인사를 헐 수는 없응께.”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운전석 위에 붙어놓은 가족 사진이 참 사랑스럽다. 2009년 3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짧은 경적은 김호연 씨만의 인사법이었던 게다. 싱글벙글, 김씨의 얼굴엔 항상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친절 안내양에 친절 기사까지, 인기가 높은 건 당연하다. 

꼬불꼬불 시골길을 벗어나면 서해의 바닷가 풍경과 갯벌의 풍경이 드러나며 마치 드라이브를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차장 처음 할 땐 멀미가 심했어유. 근디 좀 다니다 보니 멀미가 싹 없어지데유. 경치도 좋고 사람도 좋으니께 남편이나 저나 이렇게 즐겁게 다니쥬.”  

버스의 종점인 만래에 도착하자마자 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기에 바쁘다. 태안에서 가득 싣고 온 정을 이곳에서 풀어놓는다. 그리고 출발 시간이 되면 또다시 사람들의 정을 버스에 가득 싣고 태안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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