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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사연 따라가는 여행] 경북 예천 석송령과 황목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부자 나무의 선행 이야기
[사연 따라가는 여행] 경북 예천 석송령과 황목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부자 나무의 선행 이야기
  • 손수원 기자
  • 승인 2010.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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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석평마을의 당산목이자 땅 부자인 석송령.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 = 예천] 익산 함라마을엔 만석꾼이 셋이나 살았다는데(2010년 1월호 참조), 경북 예천엔 부자(富者) 나무가 둘이나 있다. 매년 세금을 내고 마을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이 부자 나무들의 사연을 찾아 떠나보자.  

‘부자 나무’란 말에 ‘나무가 무슨 재주로 돈을 버나?’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알고 보니 사람 이름이 김나무 씨’라는 식으로 소위 ‘낚는’ 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예천 석평마을에 도착해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나무는 그 위용부터가 남다르다. 우산을 펼친 듯 옆으로 뻗어 자란 가지는 마치 내공 있는 서예가가 사군자를 친 듯 장쾌하고, 두 팔을 다 펼쳐도 다 못 껴안을 기둥에서는 족히 몇 백 년의 세월을 버티고 선 듯 강한 힘이 느껴진다. 나무 앞에 설치된 안내판을 살펴보니 무려 60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라고 한다. 약 600여 년 전 북쪽에 있는 풍기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마을 앞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 온 나무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건져 올려 이곳에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주민들은 이 나무를 당산나무로 여기고 해마다 음력 정월에 동제를 지낸다. 

예천군의 토지대장에는 석송령과 그에게 재산을 물려준 이수목의 이름이 함께 실려 있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이처럼 석송령은 마을의 당산나무이자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된 문화재지만, 이에 더해 ‘부자 나무’, ‘장학금 나무’란 타이틀로 더 유명하다. 

“나무 소유로 땅이 있어요. 그 넓이가 대지 3937㎡(약 1191평), 논밭이 5087㎡(약 1541평)이나 되니 상당한 땅 부자인 셈이에요.”
예천군청 문화관광과 성영희 씨에 의하면 석송령은 토지대장도 있는 어엿한 땅 주인이라 한다. 어떻게 사람도, 동물도 아닌 나무가 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석송령이 이렇게 땅 부자가 된 것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에는 이수목이라는 노인이 살았는데, 그는 꽤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재산도 물려주지 못할 터, 기력이 쇠해진 노인은 항상 그것이 근심거리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잠결에 “걱정하지 말아라”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깜짝 놀란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은 없고 오래된 소나무만이 서있었다 한다. 그제야 노인은 잠에서 깨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 노인은 곧바로 군청으로 가 마을의 수호목인 소나무에게 ‘석평마을의 영험한 나무’란 뜻으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나무 앞으로 자신의 땅을 모조리 물려주었다. 이렇게 석송령의 토지대장이 만들어진 것이 1927년 8월의 일이다. 

이런 연유로(물론 꿈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리나라 최초, 아니 세계적으로도 나무가 땅의 주인이 되는 최초의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예천군청엔 석송령의 이름으로 된 토지대장이 보관 되어 있다. 

수백 년 세월의 무게일까. 석송령의 가지는 이제 인위적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연륜이 쌓였다. 사진 / 손수원 기자

하지만 단지 석송령이 땅 부자라서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석송령은 자신의 재산을 사람들과 나눌 줄도 아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기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석송령이 우리 마을 애들 공부 다 시켰지.”

마을회관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석송령을 ‘우리 마을 최고의 어른’이라 부르며 “우리 어르신은 평생 욕심 없이 베푸시기만 하는 분”이라며 자랑을 하신다. 석송령이 소유하고 있는 논밭은 세를 주고 그 수익금을 마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쓴다. 1985년에는 대통령으로부터 500만원의 기금을 받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마을에선 ‘석송장학회’를 만들고 석송령의 재산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기적금을 넣고 예금통장도 만들었다. 덕분에 석송령은 땅 외에도 남에게 자랑할 만한 돈을 가진 ‘현금 부자’가 되었다.  

최근에는 ‘석송령 2세’를 바로 옆에 키우고 있는 중인데, 시간이 날 때마다 오가며 나무를 둘러보고 잡초를 뽑는 주민들의 모습이 마치 귀여운 동네 ‘막둥이’를 돌보듯 자연스럽다. 

세월만큼이나 굵은 석송령의 옹이. 사진 / 손수원 기자

“우리 어르신이 막걸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할머니는 올해 정월대보름에도 얼큰하게 취할 만큼 막걸리를 대접할 거라며 석송령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 마을 주민들에게 석송령은 나무 이상의 가치를 지닌 같은 주민이자 정신적 지주인 셈이다.    

예천에서 땅을 가진 나무는 석송령뿐만이 아니다. 석평마을에서 30km쯤 떨어진 금원마을로 가면 ‘동생 땅 부자 나무’를 만날 수 있다. 형제라 해서 석송령과 같은 ‘석씨 가문’은 아니고, 그의 성은 5월이면 노란 꽃이 피어서 황(黃)이오, 이름은 ‘근본 있는 나무’라 하여 목근(木根)이다. 

예천에서 땅을 가진 또다른 나무인 황목근. 사진 / 손수원 기자

황목근은 500살 정도 된 팽나무로, 그 위세가 석송령처럼 대단하진 않지만 소유하고 있는 땅으로만 보자면 1만2029㎡로 형님보다 더 부자인 셈이다. 황목근이 땅을 가지게 된 연유는 석송령과는 조금 다르다. 마을 사람들이 쌀을 조금씩 모아 토지를 샀고, 그 땅을 보다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해 1939년 2월 마을 당산나무에게 황목근이란 이름을 짓고 등기를 이전했다. 말하자면 황목근의 땅은 마을 주민들의 공동재산인 셈이다.      
 
황목근 또한 마을을 위해 장학금을 내고 있다. 황목근 소유의 토지에서 마을 주민들이 공동경작을 해 수확을 하고, 이 수확금에서 매년 100만원 정도를 모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황목근을 위한 동신제도 지낸다. 

금원마을의 당산목인 황목근 앞에는 ‘里社之神壇(마을신의 신단)’이라 적힌 제단을 마련해놓고 마을 제사와 축제를 연다. 사진 / 손수원 기자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땅 부자 나무’가 한 고장에 두 그루나 있으니 이들의 경쟁을 바라보는 것도 흥밋거리다. 석송령이 장학회를 만들어 ‘통장’에 돈을 차곡차곡 모아가자 황목근도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부동산과 소작료 등의 수입을 차곡차곡 모아 통장을 만들었다. 현재는 ‘부동산은 황목근, 현금은 석송령’이란다. 재산뿐만 아니라 이들이 매년 납부하는 세금액도 마을 주민들 사이에선 근근이 화젯거리로 떠오르곤 한다. 

다른 듯 닮은 이 두 나무를 둘러보며 마치 사이좋은 친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돈이 더 많아, 내가 땅이 더 많아’라며 옥신각신하면서도 그 모든 걸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고 서로 마주보며 ‘씨익’ 웃어 보이는 그런 비밀을 가진 친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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