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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남과 전북을 잇는 명승, 고갯길 장성 갈재를 다녀오다
전남과 전북을 잇는 명승, 고갯길 장성 갈재를 다녀오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21.11.11 0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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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들어 갈재 고갯마루는 자동차가 넘나들고 있다. 사진/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장성] 전남 장성군과 전북 정읍시 사이에 입암산과 방장산이 듬직한 덩치를 뽐내고 앉아 있다. 그 중간에 있는 해발 276m의 고갯마루. 천년 넘게 전남의 관문 역할을 하며 무수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갈재를 다녀왔다.

유생과 도적과 임금이 넘어온 전남의 산속 관문
서울에서 호남고속도로나 고속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갈 때, 정읍을 지나면 왼쪽으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앉아 있는 산이 있다.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마주할 수 있는 큰 산은 아니지만 전라북도 곡창지대를 지나다가 갑자기 나타난 산세를 보며 감탄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금남정맥과 호남정맥 사이에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 중 으뜸이 입암 산(해발 626m)과 방장산 능선이다. 그 산의 주능선을 옛사람들은 갈재라고 했다. 갈재라는 이름은 갈대(억새)가 많아서 붙여진 것.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지명을 한자식으로 변경하면서 노령(蘆嶺)이라 표기했고, 학교에선 노령산맥이라 가르쳤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다.

백양사 역에서 사북마을을 지나 언덕을 지나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병풍산(노령산)이 보인다. 사진/ 박상대 기자
갈재에 있는 통일공원. 사진/ 박상대 기자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이나 <고려사절요> 현종편에 “거란이 침입하여 왕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에 들어갔다”는 말이 표기되어 있으니 일제 콤플렉스를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갈재는 장성갈재라고 부른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룬 고개인데 도보로 이동하던 시절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나라의 주요 곡창지 대인 호남평야와 전남평야를 이어주는 유통로였고, 기타지역 사람 들이 전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갈재 아래는 정읍시 대흥면과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목란마을이 있다.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고개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이 상식이었고, 아랫마을에는 민가와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호남고속도로와 호남선 철도가 고개 아래 터널로 지나가는 지금도 목란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호남고속철도가 달리면서 새로운 철길이 놓이고, 옛터널은 민간업자가 새우젓을 숙성시키는 저온창 고로 사용하고 있다. 우마차와 자동차가 다니던 옛날 신작로에는 2 차선 포장도로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는 그 아래 터널을 통과한다. 포장도로에는 걷기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자전거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자동차를 탄 사람들은 많지 않아서 도로에 교통량도 미미한 편이다.

갈재 찻길에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사진/ 박상대 기자
자동차를 탄 사람들은 많지 않아서 도로에 교통량도 미미한 편이다.  사진/ 박상대 기자

암행어사를 유혹하여 소실이 된 기생 노아
노령은 높이에 비해 험한 고갯길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위령(葦 嶺)과 노령(蘆嶺)을 병행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도적이 떼를 지어 살면서 백주에 살육과 약탈을 하므로 나그네가 지나다닐 수 없으니 임금(성종 15년)이 모방수를 두었다”고 적혀 있을 정도이다. 70년대까지 20가구 남짓 주민들이 밭을 일구고, 산채를 뜯거나 숯을 굽고, 땔나무를 해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약탈 대신 아랫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과거 이 고개는 농산물과 생활필수품을 교류하는 지역주민들과 봇짐장수,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전남지역 유생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전남지역에 부임하는 관리들과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하다 유배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넘었다. 그 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목란마을 앞 병풍산(노령 산) 능선에 있는 갈애바위가 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호남고속 도로를 달리다가 병풍산 정상 부에 있는 예쁜 여성을 닮은 바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갈애(蘆娥)바위에 담긴 전설은 이렇다.

기생 갈애의 전설이 담긴 갈애바위. 사진/ 박상대 기자
전남 장성군과 전북 정읍시 사이를 잇는 해발 276m의 고갯마루. 사진/ 박상대 기자

갈재 아랫마을 퇴기집에 수양딸(蘆娥)이 있었는데 미모가 빼어났다. 전남지방에 새로 부임하는 부사나 감사 등 관리들이 노아와 눈이 맞아 며칠씩 지체하거나 정신이 팔려 공무를 소홀히 한다는 소문이 날정도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암행어사(盧啓命)를 파견하였는데, 그 정보가 누설되어 노아의 귀에 들어갔다. 노아는 갈재 계곡에서 상복을 입고 슬피 울다가 낯선 사내(암행어사)를 유인해서 하룻밤을 보냈다.

노아는 사내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백년가약을 약속했고, 사내는 그녀의 팔에 자신의 이름을 써주었다. 며칠 뒤 암행어사가 출두 하여 노아를 잡아오게 한 후 처벌을 하려는데 어사 앞에 엎드린 노아는 팔을 걷어 사내가 써준 글씨를 내보였다.

어사는 일전에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백년가약을 맺은 미인이 노아란 사실을 알아차 리고, 그녀를 처벌하는 대신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어명을 받아 자신의 소실로 맞이했다는 것이다.(장성군지) 요염한 기생을 처벌하기보다 한 사내의 소실이 되게 한 어사와 임금의 전략적 선택에 웃음이 난다.

남창계곡 상류에 있는 장애인도 다닐수 있는 산책로. 사진/ 박상대 기자
김형렬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박상대 기자

입암산성 오를 수 있는 남창계곡 산성골
도보 시대에 사용되던 고갯길은 인적이 끊겨 자취가 없어졌다. 몇해 전 옛길을 복원한 공사를 했지만 금세 수풀이 울창하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옛길에 들어서면 갈재를 넘어다닌 옛사람들이 생각난 다. 입암산 정상부에는 석축산성인 입암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것을 고려, 조선시대에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장성 진원면 출신이라고 하니 입암산이나 갈재가 후백제군의 요새가 아니었을까.

고려말 대몽항전기에는 몽고군과 전투를 벌였고,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에는 윤진 장군이 왜군을 맞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농민들이 정읍으로 이동하기 위해 갈재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장성군 남창계곡을 따라 경사가 완만하고 오솔길이 잘 나있다. 사진/ 박상대 기자
신선들이 숨어 지냈다는 은선동. 사진/ 박상대 기자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로동당 전남도당의 일부가 이 부근에 은거했다고 한다. 갈재 아랫마을인 목란마을에는 도로변에 당대의 효자 전일귀의 비석이 있고(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이 비석 앞에서 제를 올렸다는 이유로 관군이 비석을 훼손해버린 상태로), 백제시대 미륵석불은 온갖 세파를 가슴에 품고 중생들의 세상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갈재 즉, 입암산을 오르기 위한 길은 또 있다. 입암산은 인접한 내장산, 백암산과 함께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가을 단풍이 빼어나 찾는 이가 많다. 장성군 남창계곡을 따라 오르면 경사가 완만하고 오솔길이 잘 나있다. 

남창계곡의 풍경. 사진/ 박상대 기자
남창계곡의 풍경. 사진/ 박상대 기자

전남대 임업시험장인 삼나무숲길이나 먼 옛날 신선들이 숨어 살았다는 은선동의 비경 앞에선 감탄사가 절로 난다. 계곡에서 밝은 물이 졸종졸 흐르고, 새들이 노래하고 있다. 이 계곡 물이 흘러 황룡강을 만들고, 다시 연산강과 어우러져 바다로 흘러간다.

은선동에선 70년대까지도 스님들이 수도생활을 했다는데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남창계곡과 산성골의 단풍을 구경하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들은 유익한 여행이었다. 갈재를 여행한 후 백양사역 앞, 북이면 사거리(四街里)마을에서 맛있는 향토음식을 먹은 것은 덤이었다.

 

장성역 앞이나 군청에서 볼 수 있는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사진/ 박상대 기자 

TIP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장성역 앞이나 군청에 큰 돌기둥에 새겨놓은 글이다. 어떤 연유로 이 글을 새겨놓은 것일까?

어느 해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용단호상(龍短虎長)이라는 글귀를 내놓고, 이에 대구(對句)를 맞추라 하였다. 이 글귀는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라는 뜻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조정 대신 들은 해답을 얻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결국 장성의 노사 기정진 선생(어려서 한족 눈을 다쳐서 실명 함)에게 문의하였다.

선생은 "해(日)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해가 辰(용)방향에서 뜨는 겨울에는 짧고, 寅(호랑이)방향에서 뜨는 여름에는 길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즉시 대구를 화원서방(畵圓書方)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로 쓰면 네모난다)이라고 맞추니, 중국사신과 조정대신들이 크게 감탄하면서 「長案萬目 不如長城一目」이라는 말로써 노사선생을 찬양했다고 한다.

INFO 갈재 가는 길
백양사역 앞장성사거리버스정류장에서 갈재 아랫마을 목란마을까지 1일 5회 운행(백양사역 출발 06:40, 08:40, 11:00, 13:4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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