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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사찰 여행] 설중매가 피어 있는 남도 명찰 강진 무위사
[사찰 여행] 설중매가 피어 있는 남도 명찰 강진 무위사
  • 박상대 기자
  • 승인 2022.03.10 1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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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전경. 사진/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강진> 신라 때 원효가 창건한 후, 도선이 중건하고, 형미 등 많은 승려들이 주석하였다. 조선 세종 때 지은 극락보전이 지금도 건재하여 정부가 지정한 국보 대접을 받고 있다. 월출산 아래 명당에 조용히 앉아 있는 무위사에 홍매화가 피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무위사 설중매 꽃잎
유홍준 교수가 저 유명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로 나는 항상 무위사를 택했다. 바삐 움직이는 도회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무위사에 당도하는 순간 세상에는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또한 무위사 극락보전을 두고 “세상 국보 중에는 국보답지 못한 것이 적지 않지만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의 영예에 유감없이 답하고 있다.”고 말을 이으면서 우리나라 대표 적인 목조건축의 하나라고 말한다.

홍매화 뒤로 극락보전이 보인다. 사진/ 박상대 기자
무위사 앞마당에 봄의 전령사인 홍매화가 있다. 우수 무렵 고운 자태를 보여준다. 사진/ 박상대 기자

기자가 오래 전에 다녀온 무위사를 다시 떠올린 것은 강진에 사는 친구가 “무위사에 홍매화가 피었는데, 차 한 잔 하러 오시지 않겠는 가?” 하고 안부를 물어준 덕분이다. 봄이 오는 풍경을 찾아 남도를 여행하던 중이었으니 홍매화가 피었다면 근사한 봄소식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위사로 달려간 날, 하필이면 밤톨만한 눈송이가 마구마구 쏟아졌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여행객도 뜸한 시절에 갑작스레 눈까지 내렸 으니 무위사 가는 길은 참으로 고즈넉했다. 봄향기나 봄바람, 동백꽃 조차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극락보전 마당 앞에 서 있는 거목들(느티나무와 팽나무)은 모든 잎사 귀를 땅으로 돌려보내고 벌거벗은 몸으로 겨울을 견뎌내고 있었다.
극락보전을 등지고 서서 오른쪽 범종각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홍매화 나무가 파르르 몸을 떨고 서 있다. 나뭇가지는 물론 꽃잎에도 하얀 눈이 쌓여 있다. 그야말로 설중매(雪中梅)다. 서둘러 핀 꽃잎은 눈을 뒤집어쓰고,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은 것들은 몸을 움츠리고 있다. 세상 이치가 다 이런 모양이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우수 넘어서 동사할 수 있다는 경우 말이다. 모든 생명체는 세상을 살 때서두르지 말고 ‘때’를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무위사 해탈문 안쪽에 있는 보제루. 사진/ 박상대 기자
무위사 전경. 사진/ 박상대 기자

조선 세종 때 건축한 국보 목조건축물 극락보전
한때 무위사는 극락보전을 비롯한 건축물 23동, 암자 35개로 구성된 대가람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수차례 전쟁을 겪고, 화재를 입고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초 세종대에 효령대군의 지원으로 건립한 극락보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있다. 월출산 끝자락 양지바른 땅, 달이 뜨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건물의 기단은 주변 지세를 그대로 이용한 듯, 앞면에는 석축을 쌓았 으나 옆면은 바닥과 별 차이가 없다.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았는데 기둥 자리 둘레를 쇠시리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앉혀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 모양을 하고, 주심포계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단청을 그려 넣지 않았고, 창문도 단순한 격자 모양과 빗살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극락보전은 건축물 자체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그 안에 있는 아미 타여래삼존벽화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삼존벽화는 1476년 작품으로 가로 210cm, 세로 270cm 크기를 자랑한다. 삼존벽화에는 본존아미타 불과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지금은 무위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사진/ 박상대 기자

삼존불은 얼굴과 의상을 구성하고 있는 채색이 500년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본존불의 가사나 보살상의 의상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밖에도 극락보전에는 수월관음도·아미타내영도·설법도가 그려져 있었으며 각종 꽃을 그린 벽화 단편 29점이 남아 있었으나 1955년 분리 작업 후 새로 건축한 성보박물관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전국에서 온 유명 화원들이 모여 그렸다고 하나 흥미로운 전설도 전하고 있다. 법당이 완성된 뒤 한 노거사가 찾아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벽화를 그렸다는 전설이다. 49일째 되는 날, 주지가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법당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파랑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 다고 한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인 무위사 삼층석탑. 사진/ 박상대 기자
강진군 강영석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박상대 기자
강진군 강영석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박상대 기자

왕건의 지시로 건립한 보물 선각대사탑비
무위사 극락보전 서남쪽에는 오래된 탑비가 서 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와 이수가 온갖 풍파를 견뎌낸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비석의 제목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이다. 나라에서 정한 보물이다. 비문의 내용은 왕명을 받들어 어사대부 벼슬을 하고 있던 최언위(최치원의 사촌)가 짓고, 류훈율이 해서로 썼다. 이야기는 무위사 주지를 지내다 왕건의 집권을 예견하고, 궁예에게 살해된 형미 스님에 관한 내용이다.
선각대사 형미(逈微)는 최씨 성을 가진 신라 출신, 신라 말기의 명승이 다. 20대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불교 경전과 선법을 공부한 후, 14년 만에 돌아와 무위사에서 8년간 주지를 지냈다. 형미 스님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수많은 사람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다. 당시 삼한은 정세가 어지러웠다. 궁예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궁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한 스님은 민심을 수습할 법문을 요구받 고, “지혜로운 사람은 부모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거나 나쁜 음모를 꾸민 자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궁예는 ‘장차 왕건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예지한 형미 스님을 즉시 살해했다.

형미 스님은 918년, 속년(俗年) 54세, 승랍(僧臘) 35세로 입적했다. 훗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형미 스님에게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명을 ‘편광탑(遍光塔)’이라고 정해 탑비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탑비가 완성될 즈음 왕건이 세상을 떴고, 편광영탑비는 무위사에 세워 지게 되었다.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이다.
현재 무위사 경내의 극락보전 우측전방에 세워져 있는데 세월이 흘러 비문은 많이 마모되었고, 육안으로 읽을 수 없다.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홍매화는 종종 설중매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사진/ 박상대 기자
무위사 해탈문 안쪽에 있는 보제루. 사진/ 박상대 기자

꿈에 나타난 스님의 부탁 들어준 사람과 후손들
극락보전 서북쪽에는 산신각과 미륵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산신 각은 어느 사찰에나 있는데 미륵전은 흔치 않은 전각이다. 미륵전 안에는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얼굴이 둥글고 살이 쪘지만 이목구비는 또렷하다. 왼손은 내리고 오른 손은 들고 있으며 좌상의 키는 1.5m 정도. 당초에는 외딴 암자에 있었는데 어느 날 무위사 아래 사는 사람 꿈에 미륵 노인이 나타나 ‘외진 곳에서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고 있으니 실내로 옮겨 달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자비로 장정들을 사서 이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다시 꿈에 나타나 ‘점집을 하면 예지능력을 줄 테니 해보라.’고 했다. 싫다고 하니까 ‘그럼 환자에게 필요한 상비약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그리 해라. 후손들이 대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3대째 그 상비약을 만들어서 환자들을 고쳐 주었 고, 적잖은 돈도 모았는데 지금은 후손들이 현행법에 저촉되어 약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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