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특집 ② 오름이 있는 제주 여행] 못을 품은 언덕을 걷다, 제주 금오름
[특집 ② 오름이 있는 제주 여행] 못을 품은 언덕을 걷다, 제주 금오름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3.09.13 0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인날, 오렌지빛 노을이 아름다운 제주 금오름을 올랐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인날, 오렌지빛 노을이 아름다운 제주 금오름을 올랐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제주] 비바람이 세차게 분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 파란 마분지에 띄엄띄엄 솜뭉치를 붙여 놓은, 그림책처럼 예쁜 날이었다. 분명 노을도 근사할 터였다. 오렌지빛 하늘과 작은 못을 만나기에 적당한 날. 주저할 것 없이 금오름을 올랐다.

금오름은 제주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오름 가운데 하나다. 금악리 마을에 들어서면 남동쪽에 의젓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마니아들만 알음알음 찾아왔었지만 몇 년 전 이효리가 아이유와 석양을 보기 위해 올랐던 모습이 방송을 타면서 단번에 스타 오름이 되었다. 섬에서 몇 개 안 되는 화구호를 품은 오름으로 지금도 신비한 산정호수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오름 탐방로에서 보이는 나무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오름 탐방로에서 보이는 나무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정상까지 걷기 편한 임도가 닦여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정상까지 걷기 편한 임도가 닦여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오래 미뤄둔 숙제를 마치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두었던 금오름을 다시 찾은 건 순전히 날씨 때문이었다. 전날 비가 내린 데다 흰 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는 그림 같은 하늘이 계속 눈에 밟혔다. 이런 날 금오름을 가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아닐까.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 숙제는 빨리 해두는 것이 좋겠지.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들고 서쪽으로 달렸다.

금악리 마을에 도착해 이른 저녁을 먹고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찾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지 전에 없던 카페와 푸드 트럭도 눈에 띄고, 한적하던 곳이 몇 년 사이에 핫플이 되어버렸다. 혜성처럼 나타난 금오름의 인기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분화구 능선을 따라 한라산과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분화구 능선을 따라 한라산과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오고가는 숲길에서는 초록빛이 물씬 풍긴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오고가는 숲길에서는 초록빛이 물씬 풍긴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오름은 해발 고도 약 428m에 이르지만 실제 오르는 높이는 180m 정도에 불과하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비탈진 면을 곧게 오르는 임도(포장도로)와 지그재그로 난 숲길을 걷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해도 어려울 것은 없다. 여유 자적한 마음이라면 숲길을, 좀 더 빨리 오르고 싶다면 임도를 추천한다.

처음 찾았을 때 숲길을 가봤으니 이번엔 임도를 이용했다. 경사가 지긴 했지만 숨이 턱턱 차오를 만큼 힘이 들지는 않다.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볼 때마다 마을 전경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높이 올라선 만큼 바라보이는 풍경도 더욱 웅장해진다. 맞은편에 서 있는 정물오름을 비롯해 멀리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거의 다 도착했다는 신호다. 여기서 몇 걸음 더 옮기면 움푹 파인 분화구와 작은 못이 내려다보인다.

금오름 안내도.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오름 안내도.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INFO 금오름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산1-1

비가 오면 나타나는 산정호수
금오름은 남북 쪽 봉우리가 높고 동서는 낮은 원형의 분화구를 갖고 있다. 둥근 형태로 파인 분화구 깊이는 약 52m. 풀이 무성하게 차오른 분화구 안쪽에 하늘을 담은 물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진초록 카펫에 누군가 실수로 물을 쏟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못이었다. 어디선가 금오름에 백록담에 버금가는 못이 있다고 쓰여 있는 걸 봤는데 아마도 오래전 이야기인 모양이다. 백록담에 비유해 이름 붙여진 금악담은 예전에는 물이 화구호를 가득 채울 만큼 풍부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가뭄이 심한 때에는 물 한 방울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고 나면 제법 연못 정도 되어 보이는 산정호수가 나타난다.

오름 입구에는 푸드트럭과 카페도 생겨났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오름 입구에는 푸드트럭과 카페도 생겨났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과 오름이 맞닿은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과 오름이 맞닿은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악담이라 불리는 작은 못.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악담이라 불리는 작은 못.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처음 금오름을 올랐을 땐 물이 다 말라 버려 못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다행히 오롯한 금악담과 마주했다. 못이 작다고는 하나 오름 정상에서, 그것도 온전한 형태의 분화구 안에 물이 담겨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고 신비로웠다. 밝고 환한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못을 보기 위해 멀리서부터 찾아왔을 것인데 어제 비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것이 되려 고맙게 여겨졌다.

분화구 바닥까지 쉽게 내려갈 수 있어 연못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모여 못이 되었다가 증발해 버린 후 다시 빗물이 되어 오름에 뿌려지기를 수십 만 번,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 무한 반복되어 온 타임 루프의 궤도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없었다면 끝없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아무것도 살지 않을 것 같던 곳에서 갑자기 조심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가를 헤엄쳐 가는 오리 한 쌍을 발견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오리들일까. 뒤뚱거리며 오름을 올라왔을 것 같지는 않고, 설마 날아온 걸까. 알 수 없는 물음에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노을에 물들고
분화구 능선을 따라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북쪽 봉우리까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속으로 태양이 잠겨가고 있었다. 남아 있던 낮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들며 하늘과 맞닿은 바다까지 제 빛깔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색이 비워진 자리를 노을이 되며 낮과 밤의 교체식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처음엔 유화와 같은 강렬한 붉은색이 번져나가다가 곧 수채화 같은 옅은 오렌지 빛깔이 사방을 감싼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비양도 주변도 온통 노란빛이다. 여기에 한림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더해지니 한 상 잘 차린 노을 맛집이 되었다.

비가 내리면 분화구에 물이 고여 신비로운 못을 이룬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비가 내리면 분화구에 물이 고여 신비로운 못을 이룬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오름에서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금오름에서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오렌지빛으로 물든 금오름의 하늘.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오렌지빛으로 물든 금오름의 하늘.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어둠이 조금씩 스며들면서 희던 구름이 자줏빛이 되었다. 짙은 청색과 보랏빛이 환상적인 매직 아워(Magic Hour)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돌아서는 사람들마다 황홀한 눈빛이 되어 입가에 걸린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고요한 적막감이 채워지고 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히 떠 있고, 사람들로 북적이던 오름도 쉬어갈 시간이다. 산정에서 봤던 다정한 오리 한 쌍도 잠이 들고 있겠지.

 

이라크의 고대 유적물을 본 떠 만든 테시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이라크의 고대 유적물을 본 떠 만든 테시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1961년 아일랜드에서 온 맥그린치 신부가 일꾼들을 위한 집으로 만들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1961년 아일랜드에서 온 맥그린치 신부가 일꾼들을 위한 집으로 만들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제주 사진 명소의 원조! 성이시돌 목장
금악리 마을에는 금오름과 쌍벽을 이루는 사진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오름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이시돌 목장이다. 오름을 오르기 전에 먼저 들렀다 오기 좋은 코스다. 1961년 아일랜드에서 온 맥그린치 신부가 주민들과 합심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목장을 만든 곳인데 한 구석에 테시폰이라 불리는 독특한 외관의 건축물이 남아있다. 이라크의 고대 도시 유적지인 테시폰의 아치 구조물을 본뜬 일꾼들을 위한 집이었다고 한다. 테시폰 자체도 그렇고 주변 풍경이 이국적인 느낌이 강해 제주에서 가장 먼저 포토 스폿이 되었던 곳이다. 한 때는 웨딩드레스 차림의 커플들이 줄을 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한가해졌지만 이색적인 면모는 여전하다.

보통은 테시폰 주변만 둘러보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새미은총의 동산도 한 번 가 볼만하다. 공원처럼 잘 가꾼 산책길을 거닐며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예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성서를 토대로 세운 조각상을 찾아보는 일도 흥미롭고, 삼나무 사잇길을 올라가면 세미소오름과 삼뫼소라는 커다란 연못을 만날 수 있다.

테시폰에서 멀지 않은 새미은총의 동산도 가 볼만 하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테시폰에서 멀지 않은 새미은총의 동산도 가 볼만 하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삼뫼소 앞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이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삼뫼소 앞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이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INFO 성이시돌 목장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산록남로 5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